1939년 9월 1일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17일에는 소련이 또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9월 28일에는 수도 바르샤바가 함락되었으며,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나치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서로 나누어 먹었다.
1939년과 1941년 사이에 소련은 폴란드에 극심한 탄압을 하면서 통제를 했고,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에는 카틴 학살 등을 포함하여 조직적으로 수많은 폴란드인들을 숙청하며 공포 정치를 펼쳤다.
얼마나 죽였는지도 모른다. 독일도 폴란드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이 시기에 3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600만 명이나 되는 폴란드인들을 무참히 죽였다. 부산과 대구의 인구보다 많으니 대학살이다.
2015년 6월, 한국에 개봉된 영화 피아니스트는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Władysław Szpilman)의 저서를 바탕으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만든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홀로코스트 영화다.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된 2002년에 영국과 독일, 폴란드,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합작한 작품이다. 영국, 폴란드, 미국 출신의 배우들이 나눠서 맡았고 영어를 쓰는 영화이지만 독일군 배역은 독일어를 쓰는 독일 배우들이 맡았다.
무서워서 벌벌 떨며 보았다면 믿겠는가? 내가 전쟁이 끝나고 태어난 것을 얼마나 고맙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릴 때 척추결핵을 앓아 하반신이 없어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다른 한 손으로 수천만 개의 점을 찍어가며 그린 점묘화가 지현곤은 이 영화를 보고 작품을 남겼다. 얼핏 보면 피아노 같은데 또 권총인 것은 총구로 흘러나오는 실 같은 연기 때문이다. 권총과 피아노가 어찌 같고 다를까? 전쟁과 평화가 접시저울, 천칭(天秤)같다는 생각이다. 균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고 기울면 무너지기 때문이다.
시인 김광균은 ‘추일 서정’에서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라고 썼다. 도룬시는 토룬시로 폴란드 중부에 있는 인구 10만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이다. 1997년에 구 시가지가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우리도 나라를 잃고 상해에 임시정부를 둔 적이 있다. 강력한 저항에도 왜 폴란드가 무너졌을까?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내분 때문이다. 권력을 거머쥐려고 외세를 끌어들인 쓰레기만도 못한 정치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복잡한 유럽의 지도를 보면 폴란드의 왼쪽에 독일이 있다. 폴란드의 오른쪽 위에 벨라루스가 있고 오른쪽 아래에 우크라이나가 있다. 벨라루스는 친러 국가이니 폴란드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끼인 셈이다. 벨라루스의 아래에 있고 흑해의 위에 있는 우크라이나는 오른쪽에 붙은 러시아가 먹고 싶고 또 먹어야 할(?) 땅이다. 이웃을 잘 못 만난 것이 재앙이 되었다.
폴란드의 위에는 리투아니아가 있다. 작은 나라이지만 강한 정신과 기개가 있는 나라다. 리투아니아도 소련에 먹혔다가 소련이 붕괴되자 독립국가 연합에서 빠져나와 독립하고 나토에 가입했다. ‘발트의 길’은 리투아니아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함께 전 주민 200만 명이 모여 1989년 8월 23일 소련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며 결기를 보인 총연장 620㎞를 ‘손에 손 잡고’ 이은 인간 띠다. 그래서 독립을 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외침을 받은 것이 처음이 아니다. 1772년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프로이센 왕국(독일)·러시아 제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세 나라가 나누어 먹었다. 123년 동안이나 분할 지배를 당했다가 1차 세계대전 뒤 가까스로 독립했으나 2차 세계대전 때 동쪽의 러시아(소련)와 서쪽의 독일에 또다시 분할 점령당했다. 바로 일제에 먹힌 우리와 너무 닮았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3국에 먹힐 때는 산업혁명이 한창인 18세기 후반이었다.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은 18세기 중반에서부터 19세기 초반인 약 1760년에서 1820년 사이에 영국이 기술 혁신으로 새로운 제조 공정을 적용해서 사회와 경제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특히나 섬유산업은 혁신적인 생산 방법을 적용해서 대량생산을 하여 사람들이 따뜻하게 입고 살도록 만들었다. 비싸고 귀한 모직물에서 면화를 이용한 면직물의 수요가 급증하자 제임스 와트가 증기 기관을 개량해 대량 생산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산업혁명의 출발점이다.
그 후 면직물 공업이 산업혁명을 주도하게 되었고 기계공업이 다른 생필품과 도구, 기계, 무기를 만들어 국부(國富)가 팽창했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18세기에 팽창정책으로 영토를 넓힌 한 나라가 러시아다. 서(西)로는 폴란드를 먹었고 동으로는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먹었다. 1858년 러시아 제국이 청나라와 강제로 아이훈 조약을 체결한 후 항구와 도시를 건설하여 1872년에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이곳, 블라디보스토크로 군항을 옮겨왔다.
군항이자 무역항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03년에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시베리아 철도가 개통되어 모스크바와도 연결 되었다. 그 러시아가 조선에도 공사관을 두었고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여 거문도에 무단으로 해군을 진주시키기도 하였다. 그때가 1885년(고종 22년) 4월 15일부터 1887년 2월 27일까지이며 영국은 거문도를 해밀턴 항(Port Hamilton)이라고 불렀다.
원재료를 싸게 들여와서 완제품을 비싸게 팔아먹는 방법이 지나치면 착취가 된다. 선진국이 자본과 기술로 원주민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는 플랜테이션(Plantation)은 많은 피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개화되지 못하고 개방하지 않은 것은 그 나라의 책임이지만 19세기 까지 쇄국정책을 폈던 조선은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에서 세력다툼을 하던 러시아와 일본이 주로 만주에서 싸운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부터 1년 반 정도의 소모전이었다. 전쟁에서 이기자 일본은 기고만장해졌다. 러시아와 일본이 대등하면 그 사이에서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려던 조선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10년, 을사늑약을 당했다. 이를 한일합방이라고도 했다. 일본은 전비를 감당하려고 무지막지한 수탈을 했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만든 국가(國歌)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를 부르는 폴란드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오래오래 잘 살자는 만세(萬歲) 애국가를 부르는 나라와 함께 하자고 나섰다. 땅은 남한의 3배가 넘으나 인구는 약 3,850만 명 정도로 어찌 보면 우리와 가장 닮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나라다. 주변국, 미·중·소·일이 다 강대국이다. 그런데, 또 먹힐까 하는 걱정은 나만 드는 것인지?
조기조(曺基祚 Kijo Cho), 경남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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