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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가향주 향기에 취하다 - 술(2) -


쏟아지는 푸른 달빛이 잔 속에 담겼다. 희다 못하여 푸르러 창백한 백련의 꽃잎이 애처로이 그 속에서 유영한다. 가향주를 마시는 나의 가슴도 달빛에 물들고 은은한 꽃 향훈에 젖어든다.


가슴을 적시는 달빛 탓인가. 마음마저 갑자기 시리다. 이럴 땐 가슴을 훈훈하게 덥힐 술 한 잔 있어도 좋다. 한 모금의 술은 오감五感을 일제히 활짝 열어젖히게 할 것이다.


술의 성분은 물이 다수지만 속성은 불이다. ‘바슐라드’도 알콜은 타오르는 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술은 사람의 욕망에 불을 붙여 뜨겁게 타오르게 한다. 아폴로의 야성은 잠자고 디오니소스의 욕망만 날뛰는 세계에서 술은 가슴을 활활 타오르게 한다. 술은 합법적인 마약인가.


술은 가슴을 더욱 풍만하게 하고 그 불기둥이 육신을 달아오르게 한다. 주체 못할 신열까지 들끓어 영육을 달군다. 한 잔의 술에 오늘밤만큼은 나를 맡기고 싶다. 밤은 알코올보다 나를 더 취하게 한다. 별빛마저 잠든 밤하늘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침묵할 때 그것이 주는 분위기는 묘한 안도감마저 안겨준다.


언제부터인가 홀짝홀짝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 잦아졌다. 사위에 어둠이 지피면 인생의 뒤안길을 걷고 있다는 위기감이 시나브로 숨어든다. 그것이 나를 우울케 한다. 내 곁에서 멀어져 가는 게 청춘만은 아닐 것이다. 머잖아 성장한 세 딸들도 제각기 갈 길을 찾아 나설 것이다.


가능할 것이라 믿어온 일들도 때론 빛바랜 희망사항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어찌 인간사가 뜻한 대로 다 이루어지랴. 도전할 수 있는 미래도 안주하는 둥지가 튼실해야 가능하련만 지나친 욕심에 때론 전전긍긍한다. 똬리를 튼 욕망은 무엇일까. 이룰 수 없는 꿈은 한낱 허상임에도 손끝이 닿을 수 없는 존재들을 탐한다.


그렇기에 때론 나도 술이 한잔 마시고 싶다. 술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약손인가. 마음이 허허로울 땐 나도 모르는 사이 술에 의존한다. 그것은 중독과는 다른 의미로 자리하는 의타심일 것이다.


마을 앞에서 노점상을 하는 과일 가게를 자주 찾는다. 갈 때마다 젊은 내외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다. 금슬 좋은 내외이다. 아내는 곁에서 일하는 남편을 위해 틈틈이 과일주며 꽃잎 주를 담갔다. 결혼한 이래 힘들게 살면서도 부부싸움 한번 해본 적이 없다고 했었다.


그런 두 사람의 사랑을 시샘이라도 한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바깥 남자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떠난 휴가 길에서 깊은 물속에 들어간 아들을 구하려다가 격류에 휩쓸려 남편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 날 이후로 과일가게 여주인은 남편을 위해 담근 술로 슬픔을 달래곤 했다.


그녀의 정신을 좀먹는 마약과 다름없을 줄 어이 알았겠는가.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일을 못할 만큼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곱상한 얼굴엔 주독마저 올라 벌겋게 상기되곤 하였다.


성격마저 변해 가는가. 그녀 언행이 차츰 거칠어졌다. 자연 단골손님 발길마저 끊어지기 시작했다. 가슴을 녹이고 격을 갖추는 술이 한 여인의 삶을 무너뜨릴 줄이야…. 술로 인한 삶의 파괴를 목전에 목격하면서도 이것에 대한 환상을 저버리지 못하고 있다. 분명 술이 아니어도, 중독성이 강한 그것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나를 곧추세울 수 있는 게 있으련만.


친구가 찾아오거나 어렵고 귀한 손님이 집안에 찾아오면 우리 조상들은 먼저 주안상부터 정성껏 차렸다. 예로부터 술은 격식을 차리는 기호식품이었다. 행세깨나 하는 집안에선 명절 때가 아니어도 술독에 술이 마를 날이 없었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술 이름으론 탁주에서부터 맑은 빛깔의 소주, 향이나 빛깔을 살리기 위해 꽃이나 과일 껍질로 담는 가향주, 밥알이 개미처럼 둥둥 떠 있다 하여 부의주, 흰 아지랑이처럼 술 빛이 아롱거린다 하여 백하주, 진달래꽃을 넣었다하여 두견주, 정월 초하루에 마신다하여 도소주, 말날만을 택하여 네 번 빚는다 하여 사마주, 청명 날 밑술을 담근다고 하여 청명주, 비스듬히 누운 소나무를 넣고 술을 빚었다고 와송주, 정월 대보름에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는 귀밝이술…. 등등이 있잖은가.


술은 조상님들의 제사상에만 오르는 게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15세가 되어 성인이 되었음을 상징해주는 관례를 올릴 때도 술은 자리했었다. 이때 술은 어른이 되므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으리라.


포도주는 오래 익힐수록 그 맛의 진가를 발휘한다. 인격도 성숙할수록 인간은 지혜롭다. 한잔 술을 자기 위안의 매개물로 삼을 게 아니라 술이 지닌 속성을 본받아야겠다.


술잔 속에 달을 담그는 풍류만 즐겨야겠다. 오늘 밤 가향주의 향기에 취하며 비록 남정네들의 춤이련만 한량무라도 한바탕 추어야 하련다. 가슴에 고인 헛된 욕망을 가셔내기 위해서라도 연꽃잎으로 담근 술 향기에 달빛이라도 풀어야겠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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