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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검은 꽃잎 -숯-


어린 날 외가에 가면 외할머니는 숯불에 정성껏 한약을 달였다.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층층시하 할머니 일상은 늘 분주했다. 더구나 결핵을 얻어 피골이 상접한 시누이의 병간호를 하느라 가냘픈 할머니 몸은 날로 지쳤다.


그럼에도 자신은 돌보지 않고 시집 식구 공경에 전력을 다하였다. 날만 새면 화로에 숯불을 피워 약을 달였다. 식구들 끼니 반찬으로 김을 발라 굽고 석쇠 위에 간 고등어를 구우며 된장찌개를 끓였다.


그때마다 숯은 고단한 할머니 일상을 덜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요즘은 전기, 가스 등을 연료로 하는 주방 기구가 발달해 참으로 편리하다. 그 시절만 하여도 시골에선 숯이 생활 깊이 다목적으로 활용됐었다.


긴 겨울밤, 할머니는 식솔들 옷가지를 바느질하며 숯불 다림질을 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숯불이 든 다리미로 무명천을 다렸다. 거기에선 비리한 잿물 비누 냄새가 났다. 마당가에서 눈을 맞은 이불 호청에선 알싸한 눈 내음도 풍겼다.


할머니께서 다림질 하는 동안 나는 화롯불에 고구마, 가래떡, 밤을 구워 먹곤 했다. 어느 날 주전부리를 마련하느라 화로 곁에서 떠나질 못했다. 잉걸불을 품고 있는 화롯불에선 어느새 일산화탄소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굽느라 여념이 없어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갑자기 방안 천장이 돈짝만 해보였다. 속이 메슥메슥하며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급기야 음식물을 토하며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곁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본 할머니는 엉겁결에 허둥지둥 뒤울안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파묻은 동치미 항아리를 급히 열었다. 살얼음이 동동 뜨는 동치미 한 사발을 떠와 내게 먹였다. 방안 환기도 시켰다. 그제야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 후 화로 곁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렇듯 숯은 허욕을 부리는 자에겐 가차 없이 본때를 보인다. 그날 나도 화롯불을 탐내지 않았더라면 그런 고역은 치루지 않았으리라.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눈앞이 아찔하다. 하나 이렇게 엄포만 놓는 게 아니다. 그 숯이 지닌 덕은 자못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270 여 년 전, 이미 신라인들은 숯으로 끼니와 찻물을 끓이며 찬란한 서라벌의 천년 역사를 지키기도 했다. 예로부터 숯은 장이나 김치를 담글 때 독안에 서린 독소와 냄새를 제거하였다. 또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악귀와 잔병을 물리치기 위해 금줄에 사용하기도 했다.


엄동설한엔 온몸을 불살라 추위에 움츠러든 우리들 몸과 마음을 녹여 주지 않았던가. 또한 배탈을 치유하는 상비약으로도 자리했었다. 뿐만 아니라 불국사, 해인사 등 고찰에는 수많은 양으로 추정되는 이것이 묻혀 있다. 오랫동안 문화재를 보전하는 데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근래엔 현대인들의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참살이에 일조를 하기도 한다. ‘신선하고 힘이 있다.’는 표현처럼 정녕 그것엔 우주의 정기가 담뿍 담겨 있는 듯하다. 조상님들의 슬기로운 지혜도 숨어 있다. 이처럼 유용한 숯이 어찌 단순한 탄소 덩어리이랴.

넉넉한 그늘과 푸름을 자랑하던 참나무, 무성했던 이파리조차 태양이 지닌 기를 그 속에 혼으로 불어넣었다. 한낱 나무 등걸이 뜨거운 정염으로 녹아나 신비로운 결정체로 남을 줄이야.


내적內賊을 물리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아낌없이 자신을 승화시켜 영생永生의 면류관도 준비했다. ‘간난艱難은 덕德의 어머니’ 라는 프르타크의 말이 맞는 듯하다. 1000도가 넘는 뜨거움 속에서도 오로지 선善을 갈구하기 위한 고통을 용케 감내한 것이다.


내 생애 단 한번만이라도 이렇듯 심신을 불사르며 고苦에서 해탈解脫을 위한 담금질을 꿈꾼 적 있던가. 누군가를 위해 아낌없이 정열의 불꽃을 피운 적 있던가. 과욕의 노예인 나로선 숯의 겸허한 헌신에 새삼 옷깃이 여며질 뿐이다.


그러나 휘황한 불빛을 지닌 문명 발달은 어느 사이 숯에 내재된 기능과 효능마저 외면하게 했다. 우리가 저버린 게 어찌 이뿐이랴. 물질에 눈이 어두워 사람답게 사는 이치도 잊은 지 오래이다.


보잘 것 없는 검은 물질인 숯도 독소를 제거하고 나쁜 기운을 정화시킨다. 그러나 우리들은 때론 정의보다 불의에 협잡하기 일쑤다. 헛된 욕망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비범한 숯의 탄생이다. 가마에서 5일 동안 온몸을 불살라 검탄, 석탄으로 태어난다. 뜨거운 불길 속 그 인고가 가히 놀랍다. 마치 구도자처럼 의연하다. 혹여 고승 사리가 이처럼 숭고하고 신비로울까. 이젠 검은 꽃잎으로 남았다. 지난날 성자의 위용도 아름다운 희생으로 불살랐다. 혼신의 힘으로 빨아올린 청량한 수액마저 속살깊이 정제시켰다. 태우고 태워 거듭남이 순백純白보다 정결하다.


진선미를 응축한 숯을 바라보노라니 경이롭기 그지없다. 나의 탐貪, 진嗔, 치痴에 의한 고苦를 멸할 때 이것을 거울로 삼을까 한다. 그러면 어지러운 세상사도 거뜬히 견뎌 나도 숯처럼 진정한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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