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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깊은 맛의 여인 -장아찌-


들녘에 어느새 따사로운 가을볕이 무한 쏟아진다. 황금빛으로 변하는 들판을 걷노라면 푸른 잎을 이고 알이 굵어가는 싱싱한 무가 눈에 띈다. 군것질거리가 궁하던 어린 시절이었다. 이 땐 무서리를 하여 먹기도 했었다.


무를 한입 가득 베어 물면 아삭한 맛이 일품이었다. 이런 무를 먹노라면 달콤하고 시원한 그 맛에 이끌려 팔뚝만한 무 한 개로 어느새 배를 채우기도 했었다.

예로부터 솜씨 좋은 아낙은 무 한 개로도 여러 반찬을 만들 수 있다고 할 만큼 무는 우리 음식에 다방면으로 활용되는 채소이다. 깍두기, 나박김치, 무생채, 무나물, 장아찌 등 무를 재료로 한 우리의 음식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장아찌는 짭조롬한 맛이 일품이어서 냉수에 밥 말아 장아찌 한 가지만으로도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울 수 있는 그야말로 밥도둑이었다.

어린 날 반들반들 윤이 나는 우리 집 장독대 뚜껑을 열어보면 그 속엔 맛난 밑반찬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어머니 솜씨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장독 속은 바라만 보아도 군침이 절로 돌정도였다. 무장아찌, 오이장아찌, 깻잎장아찌, 고추장아찌, 도라지장아찌, 더덕장아찌 마늘장아찌, 매실장아찌 등은 시설 채소를 먹지 못하던 그 시절엔 장아찌는 계절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저장 음식이었던 것이다.

요즘이야 제철 가리지 않고 온갖 푸성귀들이 시장에 나오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철 지난 푸성귀는 구경도 못했다. 그 시절 입맛을 떠올리며 올가을엔 저장식품을 몇 가지 장만했다. 시장에서 사 온 들깻잎을 열 장씩 묶어 소금물에 재워 묵직한 돌로 눌렀더니 얼마 후 노릇하게 익었다. 그것을 마른 행주로 잘 닦은 후 고추장을 발라서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아두었다.

며칠 지난 후 항아리 뚜껑을 열어 깻잎이 고추장을 완전히 흡수하면 다시금 깻잎에 고추장을 발랐다. 이렇게 하길 수 차례 깻잎이 완전히 고추장을 흡수했다 싶을 때 잘 갈무리해 두면 맛있는 고추장 깻잎 장아찌가 된다. 쌉쌀한 도라지로 담근 도라지 장아찌 맛도 가히 일품이다. 소금물에 하루 정도 절인 도라지를 물기를 꼭 짜 고추장에 담근다. 이 또한 도라지가 고추장을 흡수하면 여러 번 새로운 고추장으로 갈아준다.

싱싱한 무를 도마 위에 놓고 도독하에 썰어 소금에 절였다가 물기를 꼭 짜고 음지에서 꾸덕꾸덕 말린 것을 고추장에 버무리면 쫄깃하고 매콤한 장아찌가 된다. 이런 장아찌들을 입맛이 없을 때 갑자기 집안에 손님이 찾아올 때 통깨를 솔솔 뿌리고 고소한 참기름과 파, 마늘을 다져놓고 조물조물 버무리면 세상에서 가장 맛난 밑반찬이 된다.

요즘처럼 먹거리가 불안할 때일수록 더덕장아찌, 고들빼기 장아찌, 두릅장아찌 등으로 건강을 지켜야 한다. 무엇보다 서구화된 식습관에 의해 우리 고유 맛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세태에 다시금 우리 것을 되찾는 의미에서 올가을엔 장아찌를 담아 볼 일이다. 우리 여인들의 야무진 손끝을 통하여 잃어진 옛 정서와 식습관을 되살릴 수 있다면 일거양득이 아니랴.

집 안에 장독대가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몇 개 남아있는 항아리마저 아파트로 이사하며 슬며시 버리고 가다 보니 장아찌를 담글 공간을 잃는 것이다. 오늘이라도 반질반질 윤이 나는 항아리 하나씩 구입 하여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저장 식품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여인들이 담그는 장아찌는 단순한 저장식품이 아닐 것이다. 고향을 되찾고 우리 정신문화를 되살리고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정성과 손길을 아이들과 남편한테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는가. 인스턴트 식품, 패스트푸드에 입맛이 길들어져 비만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이즈막, 우리 조상님들이 즐겨 먹던 장아찌를 담가 가족 건강도 지켜봄이 어떨까?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장독대에 즐비한 항아리들이 마치 소중한 보물처럼 여겨진다면 나만의 생각일까? 이렇게 햇볕이 따사로운 가을날, 반짝반짝 윤이 나는 장독대에서 곰삭고 있는 장아찌처럼 나도 깊은 맛을 지닌 여인이고 싶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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