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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마음을 빚으며 - 술(3)


스스로 서당 개라고 자처한다. 그러나 어깨너머로 배운 풍월을 읊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그것을 해본 사람만이 고충을 안다. 무엇이든 정통으로 배워야 그 분야에 능통하다. 하나 곁에서 자주 보아서인가. 이젠 어지간히 손에 익혀지는 듯하다. 아무튼 서툴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수없이 시행착오를 저지르곤 한다.

예로부터 장맛 내기도 어렵다 하였거늘 그보다 더 어려운 술맛을 내려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무엇보다 잔손이 많이 가고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게 술맛 내기다. 그럼에도 나는 어린날 외할머니 곁에서 보아온 눈썰미에 가까스로 의존해 과감히 술을 담그기에 이르렀다.


술을 빚는 주원료는 곡자이다. 누룩은 술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효소이다. 곰팡이를 곡식에 번식시킨 것은 다 아는 바이다. 곡자는 밀을 빻아 만든 것이 일반적이지만 개중에는 보리로도 만든다. 나는 통밀을 빻아 만든 누룩으로 술을 빚기로 하였다.

술을 빚는 날은 매우 분주하다. 쌀을 깨끗이 씻어서 지에밥(고두밥)을 지어야 한다. 꼬들꼬들한 지에밥에 누룩 가루를 잘 섞어서 술독에 이를 넣고 적당량의 물을 부었다. 이 때 물의 양이 너무 적으면 술이 독해진다. 반면 적게 잡으면 술이 싱겁다.


알맞은 물의 비율이 술맛을 좌우하는 것이다. 술이 담겨진 항아리를 아랫목에 모셔놓고 겹겹이 솜이불을 둘렀다. 항아리가 안방에 신주처럼 모셔져 이불을 뒤집어쓸 때는 아마도 술독으로 쓰일 때 뿐이리라.

며칠 지나자 이불 뒤집어쓴 항아리에서 술 냄새가 솔솔 풍겼다. 어찌 이뿐이랴. 시간이 흐를수록 온 집안에 술 익는 냄새가 진동하다. 비록 술을 못 마시는 나였지만 술 익는 냄새에 그만 취기가 오르는 듯 갑자기 정신마저 몽롱해진다.

이렇게 온 집안에 술 냄새가 가득 퍼지니 한잔 술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절로 마음이 흥겹다. 바쁜 세상에 술을 빚는 여유로움은 아무나 누리는 게 아닐 게다. 어디 그뿐인가. 삶의 지혜마저 터득하고 있지 않은가.

안방에서 익어가는 술이 나를 보고 자신을 닮으라고 이른다.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 애쓰지 말라 한다.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함도 일깨운다. 인내와 끈기를 배우라고 한다. 욕망을 비우고 술처럼 숙성한 인품을 지니라고 말해 준다.


조급증에 길들여진 내게 무엇이든 서두르지 말고 가슴에 기다림도 간직하라고 타이른다. 어설픈 솜씨로 술을 담그며 내 인격의 미숙함도 발효되는 저 술처럼 농도 짙게 성숙했으면 하는 바람마저 가져 본다.

조상님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운치와 풍류를 즐기지 않았는가. 술은 어느 땐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지만 반면 인간의 성품을 가늠하는 잣대로도 삼았지 싶다. 함께 술잔을 기울여보면 상대방의 인품이 드러나기 때문이리라.

가슴을 녹이고 격을 갖추게 하는 술을 담그며 삶의 절제와 슬기로움도 깨닫는다. 하여 이젠 나도 더 이상 서당 개가 되지 않으련다. 하물며 귀한 곡식으로 술을 담그며 어찌 그 솜씨를 가볍게 여기랴. 나도 한 잔의 술이 되어 삶에 떠밀려 힘겹게 사는 사람들의 근심을 풀어주었음 한다. 불현듯 외로움에 지친 가슴마다 훈훈한 정도 불어넣어 주는 한 잔의 술이고 싶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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