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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마음의 가리개 -병풍-


팔작지붕이 들썩거리는 듯 했다. 이장 집 안채엔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함께 마을 여인네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예닐곱 살 때 일이련만 엊그제 일처럼 그 장면이 선명하다.


외할머니 치마꼬리를 붙잡고 당도한 마을 이장 집이었다. 그곳 안방엔 족두리를 쓰고 얼굴엔 연지곤지를 찍은 새색시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시집 온 이장 집 며느리가 안방에 앉아서 새색시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너도나도 이장 집으로 몰려왔다.


사람들이 운집한 무리에 끼어 필자도 까치발을 들고 이리저리 목을 빼었다. 어른들 틈 사이로 이장 집 새 며느리 얼굴을 잠시 훔쳐볼 수 있었다. 이 때 방안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그녀가 마치 선녀처럼 아리따웠다. 창백하도록 흰 얼굴에 널찍한 이마, 가느스름한 눈매, 야무지게 꼭 다문 작은 입이 어린 눈에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때 필자 눈에 비친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정경은 그녀가 앉아있는 방안에 둘러쳐진 병풍이었다. 봉황• 꿩• 공작• 학• 원앙 등의 길조와 모란• 국화 •연꽃 등이 그려진 8쪽 짜리 병풍이었다.


병풍 속의 형형색색의 그림들은 새색시가 입은 분홍색 저고리, 남색 치마와 조화를 이뤄 그녀의 고운 얼굴을 더욱 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훗날 그 병풍이 슬픈 사연을 간직하게 될 줄이야…. 당시 새색씨 얼굴이 유독 눈처럼 희다 여겼었다.


그녀는 이미 그때 결핵이라는 병소病巢를 지닌 채 시집을 온 것이었다. 건강치 못한 몸으로 결혼 한 그녀는 이듬 해 앵두가 빠알갛게 익어가던 초여름 날 이승을 떠났다. 필자가 어머니랑 외가를 찾았을 때가 마침 그녀의 장례를 치르는 날이었다.


그날도 외할머니를 따라 그 집엘 갔었다. 그 때 이장 집 아들은 마당에 놓인 관을 향해 꾸벅 꾸벅 절을 하였다. 지난날 그녀 방에서 보았던 병풍이 그 관을 떡 가리고 있었다. 멀찍이서 그녀의 관을 가린 병풍을 바라보자 왠지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아렸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과 함께 빛나던 지난날 병풍 속의 그림들이 그날따라 무척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병풍 속에 탐스럽게 피어난 모란도, 우아한 자태의 학도, 화려한 깃털의 공작도 그날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모두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처럼 필자 눈에 비쳤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유독 금슬이 좋았던 두 내외는 아내가 죽자 그 남편도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후 생을 마쳤다고 한다. 집안에선 홀아비인 아들을 위해 후처를 들이려고 몇 몇 여인들을 선을 보였으나 그때마다 그는 여자들을 내쳤다고 했다. 오로지 일념으로 죽은 아내만 그리워 한 것이다.


요즘 세상엔 좀처럼 듣기 힘든 이야기이다. 죽고 못 살아 결혼하고도 그 정이 얼마 못 버텨 사소한 일로 이혼을 예사로이 하는 세태 아닌가. 이장 집 아들의 순애보를 이즈막 돌이켜 보았다. 죽은 아내에게 절을 할 때 그의 양 볼을 타고 흐르던 굵은 눈물방울의 의미를 이제야 알 듯 하다.


어린 날의 추억을 떠올리노라면 죽은 아내를 향해 절을 하던 이장 집 아들의 슬픔에 젖은 모습과 함께 그 아내의 관을 가렸던 병풍이 좀체 잊히지 않는다. 병풍은 장방형으로 짠 나무틀에 종이를 바르고 종이, 비단, 삼베 등에 그림, 글씨, 자수 등을 붙이고 폭과 폭을 돌쩌귀로 연결하여 만든다.


병풍은 짝수로 만들며 본디 바람을 막거나 일정한 공간을 가리는 가리개로 단순 장식적인 면도 있으나 한편으론 주술적 의미도 담겨 있다.


요즘처럼 무엇이든 드러내놓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세태엔 병풍이란 물건이 거추장스러울지도 모른다. 부끄러움도 잊고 염치도 외면한 채 사는, 그리하여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진 현대의 삶에서야 가리고 감출게 더 이상 무엇이랴. 절제와 겸양의 미덕 따윈 헌신짝이 된지 이미 오래이지 싶다.


삶을 살며 우리가 가려야할게 딱히 추醜와 악惡만이 아닐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덕목을 갖추기 위해서 오늘이라도 진실한 마음의 가리개를 가슴에 준비해야 할까 보다.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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