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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황소가 절벽을 기어오르듯 - 지게 -


눈물은 심금을 울리는 힘이 있다. 친정어머니와 외식을 하는 식당에서 곁에 앉은 어느 남자의 인생사를 귀동냥했다. 그의 이야기 주제는 어린 날의 목격담이긴 하나 그 저변엔 가난에 대한 한이 절절히 맺혀 있었다.


그 남자의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듯한 그는 지난날의 일들을 주위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메는 음성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저씨, 전 가난에 한이 맺힌 사람입니다. 해서 결혼 한 이후 돈 몇 푼을 아끼려고 직장 다닐 때도 걸어 다니기 예사였고 친구들을 만나도 술 한 잔 제대로 사지 못하는 구두쇠가 됐었습니다. 헌데 그렇게 피같이 모은 돈을 그 놈의 욕심 때문에 하루아침에 날렸습니다.”


남의 이야기인지라 애써 외면하려 해도 식당 안이 비좁은 관계로 그 남자의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곁에서 귀동냥하기에 이르렀다. 내용인즉 자신이 얼마 전 주식으로 날린 그 돈을 모으기까지 흘린 피땀과 유독 돈에 대해 집착을 하게 된 경위를 그는 숨김없이 토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저씨,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우리 칠남매의 주린 배를 채워 주기 위해 마을 이장과 우리 밭고랑에서 만나는 것을 세 번이나 목격했습니다. 처음엔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다가 봐선 안 될 광경을 목격하곤 치가 떨렸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전 그런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을 할 땐 남자의 두 볼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려, 자네 심정 이해하네. 자네 어머니와 동네 이장의 추문이 온 동네에 파다해 오촌당숙 아저씨가 듣다못해 말 전하는 소담어멈을 삽을 들고 찾아갔지 않았나. 그토록 얌전하던 자네 자당이 오죽하면 그리했겠나.” 그 남자의 친척인 듯한 초로의 노인은 그 남자의 술잔과 자신의 술잔에 급히 술을 부으며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두 남자의 대화를 부득이 낱낱이 듣게 됐다. 오십대 후반의 그 남자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한다. 학교만 파하면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지게를 지고 마을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던 일을 서두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있었다. 자식들의 호구지책을 위해 쌀 한 가마에 외간남자의 손길을 허락해야 했던 자신의 어머니의 부정한 행위를 말할 때는 듣는 내 쪽이 왠지 민망했다. 결혼 후 대물림한 가난 때문에 돈을 버는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일들을 말 할 때는 마치 성당에서 신부님 앞에 고백성사를 하듯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면서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나의 귓가에서 한동안 맴돌았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입니다. 삭풍이 살을 에던 어느 겨울날 아침, 우리 집 마당에 ‘쿵’하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떠 문을 열어보니 동네 이장이 쌀가마를 내려놓는 소리였습니다. 쌀 한가마니를 정지 문 앞에 내려놓고 안방으로 들어간 이장이 영 바깥을 안 나와 전 그가 지고 온 지게를 몰래 뒷산으로 끌고 가 제 힘껏 때려 부셨습니다. 그때의 후련함이란…. 지금도 이장네 지게만 떠올리면 가슴이 벌렁거리고 온몸이 떨립니다. 저는 그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어머니가 한없이 원망스럽습니다.”


한편 자식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외간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그 남자의 어머니. 그 처지를 떠올리노라니 나도 모르게 연민의 정이 솟구쳤다. 이렇다 할 능력이 없었을 그 남자의 어머니는 자신의 몸을 더렵혀서라도 자식들의 생명줄을 지켜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처절한 마음을 알 리 없는 자식은 아직도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듯 우리 어머니들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식들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하며 피폐한 삶을 영위해야 했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현대 여성들처럼 많이 배우지 못하여 전문적 지식을 갖추지 못하다 보니 가난과 맞설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연히 듣게 된 어느 남자의 지난날 가난에 대한 회한과 가슴 아픈 사연을 들으며 까맣게 잊고 지내던 지게를 문득 떠올려 봤다. 우리 조상들이 발명한 가장 우수한 연장인 지게는 양다리 방아, 발 무자위 등과 더불어 농경 사회에 곡물, 연장 등을 얹어 사람이 지고 나르도록 만든 필수적인 운반 기구였다. 자동차가 발달한 이즈막에야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물건이 되었지만 예전엔 농촌에선 집집마다 집안에 지게가 놓여 있었다.


우리 민족의 삶의 애환을 함께한 지게는 때론 부와 가난을 연결하는 매개체였다면 지나칠까? 예로부터 농토가 많아 지게질이 잦으면 그만큼 부를 의미했고 들녘에 나가 종일 일을 해도 빈지게로 돌아오면 가난을 뜻하기도 하였으니. 또한 지난날의 가난을 논할 땐 항상 화제에 빠지지 않는 게 지게였잖은가. 종전에 만난 그 남자도 마을 뒷산에 올라 나무를 하여 무거운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시오리 길을 걸어 장엘 다녔다고 했었다. 또한 자신들의 주린 배를 채울 쌀 가마가 집 안에 운반된 것도 이장네 지게에 의해서였다.


어디 이뿐이랴.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서울역 광장에서 지게꾼들이 지게를 받쳐놓고 짐 실을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농사일을 돕는 기구에서 수십 년 전만 해도 생계를 돕는 본격적인 기구로 둔갑한 지게이다.


지게는 가지가 약간 위로 뻗어난 자연목을 소재로 만들기도 한다. 그 종류로는 제가지게, 옥지게, 쪽지게, 바지게, 두 구멍 지게, 쇠지게, 켠 지게, 쟁기지게, 모지게, 물지게 등이 있다. 지게는 물건들이 균형을 이뤄야 짐을 제대로 운반할 수 있다. 우리네 삶도 쓴맛 단맛 골고루 맛봐야 황소가 수레를 끌고 절벽을 오르는 격인 인생의 역경도 거뜬히 이겨내리라.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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