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열 목사 목회 칼럼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우물을 안(outsight) 개구리
- WeeklyKorea
- 5월 13일
- 3분 분량

서커스 무대에서 원숭이와 광대가 대결을 합니다. 원숭이는 광대가 숨겨둔 바나나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찾아내는데 성공합니다.
오늘도 승자는 원숭이입니다. 당황하며 허둥대는 광대를 뒤로한 채 성공의 보상으로 받은 바나나를 끌어 앉고 히죽거리는 원숭이에게 관객들의 박수가 이어집니다.
원숭이의 비극
그런데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원숭이의 집중력과 지능으로 정작 신이 난 대상은, 갈수록 관객을 더 많이 끌어 모을 수 있게 된 광대였습니다.
원숭이가 광대와 겨루어 이겼고 그래서 승리의 보상으로 바나나를 받았으니 원숭이가 이긴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원숭이가 애처롭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원숭이는 자기가 승리한줄 알지만 실상은 광대가 짜놓은 판에서 꼭두각시일 뿐이었습니다. 실상 원숭이의 성공은 광대의 조련에 의해 길들여진 것이었습니다. 원숭이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성공을 얻은 줄로 알고 있지만, 원숭이는 광대의 조련에 의해 철저히 조정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숭이는 성공과, 보상의 바나나와, 박수로 행복을 느꼈지만, 그것은 길들여진 행복이었습니다. 조련에 의해 길들여진 원숭이는 어느 순간부터 그 조작된 행복을 위해 그의 삶을 올인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원숭이의 비극은 광대가 숨겨둔 바나나를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길들여진 원숭이임에도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줌인/zoom in된 지금 상황은 희극의 삶을 살고 있지만, 줌아웃/zoom out으로 보면 비극의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우물 안 개구리 상황은 행복이지만, 우물 밖에서 본 개구리 상황은 비극인 겁니다.
빠삐용의 행복
그래서 질적 공리주의자인 밀(Mill, J. S. 1806-1873)은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낫고,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고 설파했습니다. 배부르기만 하면 만족하는 바보 돼지의 꿈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빠삐용처럼 감옥에서 벗어나려는 꿈이 아니라, 감옥 속에서 불편 없이 살아가는 꿈을 꿉니다. 감옥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 수세식으로 바꾸어 주시고, 자주 동나는 화장지 넉넉하게 주시고, 기왕 주시려면 꽃 냄새 그윽한 부드러운 화장지로 바꿔주시고, 겨울이나 서늘한 저녁에는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 소원이 이루어지면 웃고 행복하고, 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울고 불행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바라는 천국은 성공적인 노예생활이었던 겁니다. 광야에서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려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과 진배없습니다. 이들의 광야가, 줌인으로 볼 때는 비극이지만, 줌아웃으로 볼 때는 희극인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겁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가 추구하는 제사/예배의 목적은 구원을 얻어 내기 위함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종교역시 그랬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를 기록한 모세는 구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드려지는 목적 있는 예배를 배격합니다. 오히려 예배의 목적이 구원이 아니라, 구원의 목적이 예배임을 강조합니다.
모세오경(토라)의 순서는 구원의 여정을 너무나 정확하게 제시합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은 죄를 지었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에서 이들은 그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전적인 하나님의 의지로 구원을 받습니다.
레위기는 구원받은 이들의 예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민수기에서는 이들이 어떻게 봉사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신명기에서는 이들이 어떻게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성서의 거의 25%를 차지하는 모세오경을 통해, 모세는 말씀에 순종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봉사를 잘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배를 잘 드려서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명확히 말합니다. 예배의 목적이 구원이 아니라, 구원의 목적이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성공적인 노예생활이 구원은 아닌 겁니다. 빠삐용처럼 노예생활을 벗어나는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인 겁니다. 잘 먹고 잘사는 이집트가 아니라, 못 먹고 못사는 광야가 구원인 겁니다.
예배는 내 이성 내 경험이라는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물 속 현상을 모두 파악하고 해석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우물 밖의 현상을 바탕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면 어리석은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물을 안(outsight) 개구리
빠삐용은 진정한 행복을 알았기에 감옥 속 행복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않습니다. 빠삐용은 성공적 노예 생활을 지속하기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의 간증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하박국은 감옥 속에서 불편 없이 살아가는 것에 행복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복은 따로 있었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하박국 3:17-18)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고 산다는 것은 빠삐용의 행복입니다. 우물 안(in) 개구리에서, 우물을 아는(outsight) 개구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당면한 문제를 99%라며 안달하던 삶에서, 단지 1%라고 인식하는 삶의 태도가 지치지 않는 빠삐용의 행복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박성열 목사 목회 칼럼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박성열 목사는 뉴질랜드 남십자성어린이예술단 음악감독으로 8년(1997-2004)간 봉사했으며, 뉴질랜드 시온합창단(성인혼성) 지휘자로 또 8년(2005-2012)간 봉사했다. 또 뉴질랜드 오페라단 단원으로 12년(2005-2016)간 활동했다.
현재는 오클랜드 장로합창단 지휘자로 7년(2014- 현재)째 봉사하고 있으며, 오클랜드 오라토리오코랄 운영위원장으로 6년(2015- 현재)째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뉴질랜드 예수찬양교회 시니어 목사로 19년(2007- 현재)째 사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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