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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을 잠재우는 애프터눈 티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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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정말 홍차의 나라일까? 영국 사람들에게 애프터눈 티타임의 전통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오로지 홍차를 마시러 런던에 간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를 한 달 정도 앞둔 계절이었는데, 거리는 이미 본격적인 겨울 채비에 나섰고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서울이라면 늦가을의 단풍 정취를 한창 만끽할 때였으나 런던은 무거운 회색 하늘에서 차가운 비가 추적추적 뿌려댔다. 춥고 습한 날씨엔 뜨거운 홍차만큼 좋은 게 없다. 런던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나는 홍차 한잔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홍차는 찻잎을 볶고 말리고 산화시켜 찻잎이 감춰둔 다양한 맛을 끌어내는 음료다.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내면 붉은빛이 감돌기 때문에 우리는 홍차(紅茶)라 부르지만 영어로는 까맣게 말린 찻잎의 색상 때문인지 블랙티(Black Tea)라 한다. 실제로 홍차의 나라 영국에선 거두절미하고 ‘티’라 부른다.


마치 사랑스런 친구를 부르듯이 말이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간판에 300년 전의 연도가 붙어있는 티 메이커 ‘트와이닝스(Twinings)’를 찾았다. 트와이닝스는 우리나라 슈퍼마켓에서도 흔히 볼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인 홍차 브랜드지만 런던 시가지 한복판의 유서 깊은 건물에 자리하고 있으니 역사와 전통이 남달라 보였다.

1700년대 차는 두통이나 복통 등 시민들의 일상적인 통증과 질병을 말끔히 해소해주는 만병통치약이었고, 중국에서 수입되었으므로 가격도 꽤나 높았다. 차 수급이 원활해지도록 영국은 식민지인 인도에, 그것도 중국과 가까운 히말라야 고원지대에서 차를 재배하기에 나섰다. 이렇게 만들어진 홍차들이 그 유명한 다즐링(Darjeeling) 홍차와 아삼(Assam) 홍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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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차 재배로 영국의 홍차 문화는 대중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고, 수많은 차 상인들은 홍차를 다채롭게 즐길 방식을 고안하게 된다. 트와이닝스는 얼그레이를 최초로 만든 곳으로 알려져 있다. 찻잎에 이탈리아산 감귤류인 베르가못 오일(Bergamotte Oil)을 넣어 중국차 고유의 향을 흉내낸 것이다.


중국차가 귀할 때 적절한 대용품으로 생겨났는데, 지금은 얼그레이 그 자체가 고유한 장르가 되어 전 세계에서 널리 즐긴다. 트와이닝스에서는 무조건 얼그레이를 사야 하는데 그 종류가 꽤 많다. 백작의 홍차라는 뜻의 ‘얼그레이(Earl Grey)’가 다소 뚜렷하고 직선적이라면 꽃과 과일향이 가미된 ‘레이디 그레이(Lady Grey)’는 우아하고 풍부한 향미가 특징이다.

노팅힐에 있다는 어느 찻집을 찾아가는 길엔 빈티지 마켓이 성황리에 열리고 있었다. 추적추적 궂은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곧 다가올 연말 파티를 준비하러 나온 사람들이 식기며 가구며 장식품 등을 고르느라 북적거렸다. 티를 마실 때 쓰는 도구에는 찻잔, 찻주전자에서부터 접시, 포크 스푼, 디저트를 꺼내고 담을 기타 도구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보통은 도자기류를 떠올리지만 이곳에선 은제품으로 구색을 맞추며 티타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유럽에선 은제 찻주전자를 볼 기회가 자주 있었다.

오후 세 시를 넘긴 시각, 노팅힐에 있는 보라색 간판을 건 찻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곳엔 내게 허용된 티테이블이 없었다. 본격적인 애프터눈 티타임의 현장이었다. 동그란 탁자엔 흰색 테이블보가 깔려있고 테이블마다 접시에 가득 담긴 티푸드들이 영롱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찻주전자에서는 따스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났고 사람들마다 대화의 열기도 보통이 아니었다. 동네에서 꽤나 입심 좋은 마담들이 모였는가 했는데, 그중에는 신사들도 수다왕 선발 대회라도 나온 듯 목소리도 웃음도 사뭇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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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묵하고 웃음에 인색하다고 알려진 런던 사람들조차 감정을 감추지 않고 몽땅 드러낼 수 있는 그 시간이 바로 애프터눈 티타임인가 싶었다. 딱히 중요한 의논을 하러 모였겠는가!


잠시 후면 휘발되고 말 그저 그런 이야기들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무해하고 유쾌한 이야기 시간이야말로 인생에 가장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영국식 티타임을 시간대로 나누면,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열 번도 넘는다고 한다. 그중에서 오후 3~4시 쯤에 마시는 애프터눈 티타임은 풍성한 티푸드로 점심과 저녁 사이의 공백을 채우는 시간이다. 식사 시간이 지금과 달랐던 18세기 귀족 사회에서 형성된 관습 중 하나가 생활 문화로 정착된 것이다.

홍차를 즐기는 일에는 푸짐한 티푸드가 한몫을 한다. 층층이 놓인 접시에는 저민 오이를 넣은 샌드위치 등 출출한 허기를 잠재우는 짠 음식 세이보리(Savory), 영국식 버터비스킷인 스콘(Scone), 그리고 달콤한 과자류 스위트(Sweets)가 각각 채워진다.

대화가 끊어지면 음식을 즐기면 되는데, 차도 음식도 계속 채워준다. 때때로 샴페인 한 잔을 따르며 축배하듯 애프터눈 티타임을 즐겨도 된다. 일상의 불운을 잠재우기에 충분한 값어치를 한다.

그 유명한 리츠호텔 라운지나 포트넘 앤 메이슨백화점의 애프터눈 티는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겨울 축제를 준비하는 런던에서는 오후의 홍차도 경쟁률이 치열했다. 차 한 잔 못 마셨다고 이렇게 쓸쓸할 일인가! 그때 내 앞에 구원자처럼 미술관이 나타났고 나는 그림 보기에 앞서 카페로 달려갔다.


그곳엔 나처럼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 그림 보는 것과 무관하게 차 한 잔이 필요한 사람들이 여유 있게 차를 즐기고 있었다. 얼른 자리에 앉아 따스한 얼그레이가 가득 담긴 찻주전자를 받아 들면서 나는 오후의 홍차가 얼마나 기쁜 것인지 알아버렸다. 외로움도 불운 따위도 멀리 사라졌다. 따스하고 향기로운 홍차의 기쁨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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