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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WeeklyKorea

페르시아 제국의 빛과 그림자…2500년 역사 ‘타임머신 여행’

에스파한에 가는 건 나의 오래된 꿈이었다. 이란 중부에 있는 에스파한은 페르시아 문화를 상징하는 도시다. 국제뉴스를 오래 써온 기자로서, 이란은 언제나 중요한 주제였다.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란을 ‘악의 축’이라고 비난하던 2006년 처음으로 테헤란에 갔고, 2020년 이란혁명수비대의 정예부대인 쿠드스부대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가 미국에 의해 암살된 뒤 긴장이 고조된 상황을 취재하러 또다시 테헤란에 갔다.


그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과 ‘이란 문화의 중요한 곳들’을 신속하고 강하게 공격할 수 있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이란을 취재할수록 ‘반미국가’ ‘신정국가’로만 단순하게 파악할 수 없는, 이 나라의 복잡미묘함이 더욱 궁금해졌다. 위험한 나라라고 겁먹고 갔다가, 역사·문화의 깊이와 사람들의 따뜻함에 놀라게 되는 나라다. 이란의 역사를 알아야, 국제 정세도, 아시아의 역사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에스파한 같은 역사적 도시들을 보고 싶다’는 바람이 커져갔다. 지난 7월 이란을 연구하는 학자와 학생들을 따라나섰다. 비자는 이란 외교부 e-비자 시스템에서 온라인으로 신청하고, 주한 이란대사관에 가서 받아야 한다.


한국에서 이란으로 가는 직항은 없다. 카타르나 튀르키예(터키), 아랍에미리트 항공편으로 각각 도하·이스탄불·두바이를 경유해 14시간 이상 걸린다.


페르시아 문화의 중심 ‘에스파한’

이란은 하나의 도시에 갈 때마다, 다른 시대로 가는 타임머신을 타는 것 같다. 에스파한은 셀주크(1037~1194)와 사파비 왕조(1502~ 1736) 시대로, 페르세폴리스는 250 0여년 전 아케메네스 제국으로, 야즈드는 이슬람화 이전 조로아스터교의 문화 속으로, 테헤란은 카자르 왕조(1779~1925)와 팔레비 왕조, 그리고 지금의 이란이슬람공화국 핵심으로 데려간다.

7월15일 에스파한에 도착하자마자, 낙셰자한 광장으로 달려갔다. 사파비 왕조의 강력한 통치자였던 샤 압바스(아바스 1세)가 1598년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건설한, 페르시아 도시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길이 510m, 너비 163m의 규모. 중국 베이징 톈안먼(천안문)광장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광장의 동서남북엔, 이맘 모스크, 알리카푸 궁전, 셰이크 로트폴라 모스크, 그랜드바자르로 들어가는 입구가 각각 배치돼 있다.

공식 명칭은 ‘이맘광장’이지만, ‘세상의 원형’이라는 뜻의 낙셰자한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어울린다. 47만개가 넘는 푸른 타일로 장식한 이맘 모스크, 왕실의 일상과 꽃과 식물들을 정교하게 묘사한 세밀화, 그리고 악기 모습 조각을 가득 담은 음악의 방을 갖춘 알리카푸 궁전을 둘러보면,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압도해 통치했나’ 싶어지기도 한다.

제국의 화려함과 권력을 뒷받침한 것은 경제력과 포용성이었다. 이것을 실감하게 하는 곳이 에스파한 시내 남쪽의 아르메니아 기독교도 거주지인 졸파(뉴 졸파)다. 샤 압바스는 17세기 초 15만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북부에서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샤 압바스는 실크무역으로 유명한 아르메니아 상인들을 후원해 큰 수익을 얻었다. 아르메니아 상인들도 이곳 졸파를 거점으로 유라시아 전역에 실크무역 네트워크를 만들었는데, 서쪽으로는 런던, 동쪽으로는 티베트의 라싸, 중국 광저우, 인도네시아, 싱가포르까지 이어졌다.


지금의 엄격한 이슬람 신정체제에서도, 졸파에서는 강렬한 색채의 기독교 성화들로 가득한 교회들이 역사의 풍파를 견뎌내고 살아남았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독자적 공동체가 이어지고 있다.

저녁이면 에스파한 시민들은 자얀데강 위의 다리들로 간다. 자얀데강은 이들에게 ‘생명의 강’이다. 한낮의 매서운 더위를 견디고 저녁이 오면, 다리에서 산책하고 다리 아래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여유를 즐긴다. 하지만, 지난달 시오세다리에 갔을 때 강물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한 시민은 “5년 전부터 강물이 사라졌다. 주변에 철강·타일 공장을 너무 많이 세워 공업용수로 써버리는 바람에 강물이 이곳까지 오지 못한다”고 했다. 올해는 더욱 극심한 폭염 속에, 강바닥은 메마른 채 잡초들이 무성하고 곳곳에 나무들까지 자라났다. 이걸 바라보는 이란인들의 마음은 더욱 바짝 타들어 가겠지.


술은 못하지만 다양한 케밥이

페르세폴리스를 떠나 사막의 도시 야즈드로 간다. 아랍의 정복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전 이란인들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였다. 사막을 가로질러 정복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야즈드는 최후까지 조로아스터교가 살아남은 도시다.


지금도 이곳엔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남아 있다. 야즈드 외곽에 있는 다크메(침묵의 탑)는 조로아스터교 전통에 따라 죽은 이들을 조장(주검을 밖에 내다 놓아 새가 파먹게 하던 장사 절차)하던 시설이다. 꽤 긴 계단을 올라 거대한 탑의 꼭대기에 도착하니, 평평한 조장터 한가운데 큰 구덩이가 있다.

높은 탑 위에 둔 주검을 새들이 뜯어 뼈만 남게 되면, 이 구덩이에 산을 부어 녹인 뒤 분골을 만들어 매장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세상을 이루는 물·불·공기·흙을 신성하게 여기는데, 주검이 신성한 흙을 오염시키지 않게 하려 한 것이다. 야즈드에는 1400년 동안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신성한 불을 모신, 조로아스터교의 ‘불의 사원’(어테쉬 베흐람)도 있다.

야즈드 옛도시의 미로처럼 이어진 거리를 헤매는 것은 역사 속을 걷는 것이다. 사막도시에는 목재가 부족해 진흙으로 집을 짓고 외부 침입을 방어하려고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이어지도록 만든 이 도시는 수백년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소중한 물이 증발하지 않도록 고대부터 지하수로와 물 저장 시설들을 발전시켰고, 건물 옥상마다 압력 차이를 이용해 찬 바람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더운 바람을 밖으로 내보내는 ‘바드기르’라는 높은 탑들이 세워져 있는 모습은 야즈드의 상징이다.

이란의 역사는 북쪽으로부터 계속 침입해오는 유목민 ‘투란’과의 대결이었다고 한다. 아랍·몽골·터키의 ‘투란’ 정복자들은 말과 칼로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지만, 통치할 때는 페르시아 문화와 관료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들의 궁정에서 공용어는 페르시아어였다.

이란인들은 그렇게 곡절 많은 역사와 문명의 교차로에서, 풍성한 페르시아 문화를 숙성시켰다. 이란의 요리에도, 카펫에도, 건축에도 그런 만남과 얽힘에서 만들어진 매혹적인 다양함이 있다. 이란인들이 외세의 개입을 경계하면서도 외부의 손님을 따뜻하게 환대하는 것도 그런 영향일 것이다.


이란에서 술은 금지돼 있다. 하지만, 미식가들이라면 페르시아 음식과의 만남을 기대할 만하다. 양·소·닭고기로 만든 다양한 케밥, 신선한 양고기 구이, 화덕에서 구워내는 여러 종류의 난(빵), 쌀밥에는 다양한 채소와 사프란 같은 향신료가 듬뿍 곁들여진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익은 과일은 놀랄 만큼 달콤하면서 저렴하고, 장미수와 다양한 과일, 바질시드 등을 넣어 만드는 전통 음료들은 눈과 입을 행복하게 한다.

숨 막힐 듯한 더위가 가신 밤, 옥상 카페에서 바라보는 야즈드의 진흙 지붕과 바드기르, 모스크의 첨탑들이 끝없이 겹쳐지고 이어지는 풍경은 잊기 어렵다.


에스파한 낙셰자한 광장에 가족·친구들끼리 나와 천을 깔고 준비해온 음식으로 소풍을 시작하고 아이들은 하늘 높이 연을 올려보낸다. 현실의 무게에도 역사는 우리를 끝없이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리라. 페르시아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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