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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직녀 -삼베 짜기-


“김 씨 가문에 시집와 열여섯 살부터 배를 짜기 시작했어. 그땐 왜 그리 고생스럽던지 베틀이 어느 땐 원수 같았지.”

연로하신 증조할머니는 장죽을 입에 물고 앵두가 빨갛게 익은 외가 뒤울안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증조할머니의 그 말씀을 듣게 된 이후 외가 헛간에 놓인 베틀이 왠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베 바닥 한 필을 놓으려면 손길이 수천 번도 더 가는 겨. 그러니 배가 질기고 실허지. 아홉수 삼베로 지은 입성을 식속들이 입고 나가면 동네 골목이 다 훤해 보였지. 옷이 날개긴 날개여.”

우리들에게 삼베 짜던 이야기를 할양이면 갑자기 증조할머니의 눈빛이 반짝거리고 어눌하던 어조도 또렷해져 금세 노망기도 사라진 듯하였다. 그도 지치면 할머닌 헛간에 방치한 베틀에 올라 베 짜는 시늉을 하였다.


증조할머닌 평소엔 어린애마냥 행동하가다도 ‘빙빙’ 빈 물레를 돌릴 땐 그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또한 베틀에 앉아 오른발에 베틀신을 신고 엉덩이에 부티를 둘러차고 ‘철커덕, 턱 철커덕, 턱’ 빈 베틀을 밟으며 구성지게 일노래를 뽑기도 했다.

“관솔가지 앞마당에 피워놓고/ 어서 삼세 바삐 삼세/ 붕어눈을 부릅뜨고/ 곰배팔을 바삐 놀려/ 송곳니를 앙다물고/ 어서 삼고 바삐 삼세…”

증조할머니가 빈 베틀 위에 앉아 ‘철거덕, 턱 철거덕 턱’ 베틀을 밟으며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나는 아홉수 삼베가 금방 몇 필 짜여 나오는 듯 한 착각에 빠졌었다. 풀벌레 소리가 무성한 어느 무더운 여름 밤, 증조할머니는 호롱불을 밝히고 헛간에 들어가 그날도 베틀을 밟았다.


날이 갈수록 그런 행동이 잦아졌다. 그런 증조할머니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젊은 날 부지런하고 총기 있던 분께서 이젠 노망이 들었다고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증조할머니는 열여섯 살에 경주 김 씨 가문의 대종손 맏며느리로 시집와 청춘에 홀로 되었다.


그럼에도 한 두렁에 소를 세 마리씩 몰아놓고 갈던 전답이며 집안의 대소사를 능히 꾸려 나갔다. 뿐만 아니라 세 명의 시누이와 여섯 명의 시동생, 시부모의 입성을 만들기 위해 틈만 나면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짰다고 한다.

당시 남편 없는 삶의 고독은 어떠했으며 그 고통 또한 얼마나 진했을까? 할머닌 질곡의 세월을 베 짜는 일로 달랬으리라. 그러고 보니 증조할머닌 젊은 날 어쩌면 베 짜는 직녀가 아니었을까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해보았다.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를 마음으로 만나기 위해 베를 짰고, 실하고 질긴 삼베를 만나기 위해 베를 짠 살아있는 직녀였다면 지나칠까.

증조할머니께서는 놓쳤던 정신 줄을 간간히 되찾아 잡을 때면 곧잘 우리들 앞에서 당신의 젊은 날을 회상하곤 했었다. 그땔 돌이켜보면 베 짜는 과정을 우리들에게 세세히 설명할 땐 치매 걸린 노인의 말씀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상황이 무척 실감나고 정확했었다.

어린 날 증조할머니 말씀을 기억하면 이러하다. 한식을 앞둔 음력 이월 그믐께 고샅 어귀 밭에 삼씨를 뿌린다. 음력 유월 모내기를 끝내고 피사리를 할 즈음 사람 키를 웃돌 만큼 훌쩍 자란 삼나무를 벤다고 했다. 이때 삼나무가 연할 때 베면 베가 약하고 삼나무 대궁이 너무 여물면 베가 곱지 않음으로 적당한 때를 가려야 한단다.

베어진 삼나무는 잎을 따내고 크기에 따라 단에 지어 삼굿에 쪘단다. 삼굿이란 냇가에 큰 돌을 쌓아올리고 돌 위에 나무를 엇갈리게 쌓아 그 위에 삼단을 차례로 쌓는다. 쌓은 삼단 위에 풀을 쌓고 흙을 덮으면 삼굿기 준비는 끝이란다. 이 준비가 끝나면 돌 밑에 불을 지펴 돌을 뜨겁게 달군단다. 돌이 벌겋게 달아오르면 찬물을 끼얹어 뜨거운 김을 뿜어내게 하여 이 김으로 삼이 누렇게 쪄지면서 구워진다고 했다.

\이때 여인네의 근접을 삼켰다고 하니 이는 부정을 타면 삼이 제대로 구워지지 않는다는 속설 때문이란다. 이렇게 구워진 삼은 껍질을 벗겨 한 묶음씩 묶어 삼째기를 하는데 왼손에 삼 껍질을 휘감아 쥔 다음 오른쪽 엄지 손톱 끝으로 뿌리 쪽을 꼬집어 뜯듯 찢으면서 여러 구멍을 만든다. 그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한꺼번에 훑어 내리면 삼째기는 끝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일이 끝이 아니었다. 허벅지에 시퍼렇게 멍이 들고 피가 맺히도록 하는 삼 삼기는 삼 머리 쪽 올과 삼 꼬리(줄기 윗부분 껍질) 쪽 올을 이어 긴 실을 만들기 위해 허벅지 양쪽 부분에 대고 손으로 비비는 일이란다. 삼아진 삼은 물레에 돌려 실이 여러 겹 꼬이게 하기 위해 실 짓기를 하고 실 올리기라는 실타래를 만드는 일을 한다.

이는 삼실을 덩어리로 뭉치는 일인데 이리 하면 삼실이 희고 깨끗하고 질겨진다고 했다. 이것만으론 삼 베짜기 준비가 완료된 게 아니었다. 낱실을 만드는 베 날기와 날실을 바디 구멍 하나하나마다 꿰어놓고 풀을 먹이는 베 메기의 고된 일이 증조할머니의 손길을 기다렸다고 한다. 베 매기가 끝난 후 베틀신을 신은 오른 발을 잡아당기면 날실이 따라 오르며 북이 드나드는 공간이 열린다.

이 길을 북길이라고 이른단다. 이때 잽싸게 이 틈새로 북을 끼었다 빼낸 다음 바디집을 힘껏 몸 앞으로 잡아당기면 날실 사이에 씨실이 단단히 끼여 들어가며 베가 짜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삼 베짜기가 참으로 잔손이 많이 가고 공력이 드는 일인 줄을 나는 이미 어린 나이에 증조할머니의 말씀을 통하여 짐작케 되었다. 오죽하면 “길쌈은 배우면 업이 되고 못 배우면 복이 된다.”라고 했을까. 그 고단한 작업이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삼베의 가치는 옷감이 질기어 경제적인 것 외에 삼베 고유의 향균 기능 또한 뛰어나 예로부터 삼베를 수의로 사용하기도 했다. 외국에서 발견되는 미이라조차 삼베가 입혀졌다고 하니 그 기능이 가히 짐작이 간다. 고유가, 치솟는 물가에 시달려서인지 요즘 날씨가 유독 덥다. 올여름 ‘베 고의에 방귀 새어나가듯’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라는 의미로 삼베 옷 한 벌 장만해 남편에게 입혀 볼거나.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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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 C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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