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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전설 품은 애기단풍 그늘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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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가을이다. 무덥고 습한 여름에 지쳐 더는 시원함을 기대하지 않을 때 계절은 바퀴를 굴려 가을로 우리 곁에 온다. 그러나 그 가을은 설악산 상상봉을 붉게 수놓는 단풍처럼 화려하게 오지 않는다. 불타는 단풍이란 표현은 그저 풍문으로만 떠돌 뿐 우리가 사는 곳까지 단풍이 물들려면 달포는 더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가을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가을은 살그머니 온다. 가을은 퇴근길 가로수 아래를 지날 때 슬쩍 스치는 바람 끝에 묻어나는 서늘함으로, 강둑을 따라 하늘하늘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따라, 이른 새벽 코끝을 찌르는 차갑게 식은 공기나 포연처럼 자욱하게 피어나 강을 뒤덮는 안개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슬며시 온다. 그리고 또 아침저녁으로 모닥불을 찾는 캠퍼의 마음을 따라오기도 한다. 

 

가을이 오면 생각나는 캠핑장이 있다. 내장산국립공원에 있는 가인야영장이다. 백양사 아래 조용히 들어앉은 이 캠핑장은 자연미가 넘친다. 관리와 통제가 빡빡하기 이를 데 없는 여느 국립공원의 캠핑장과 달리 소박한 이곳의 사이트는 모두 합쳐 50여 동. 많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규모다. 더욱이 차는 주차장에 두고 가야 해서 캠핑장이 붐비는 일도 없다. 

 

사이트도 운치가 있다. 키 낮은 관목이 울타리를 친 가운데 텐트 자리에는 파쇄석을 깔아 놨다. 그 곁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 전기를 쓸 수 있는 배전판도 있다. 갖출 것 다 갖췄으면서도 딱히 도드라지지 않고 조화롭다. 이런 캠핑장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가인캠핑장을 찾지 않는다. 가을에 이곳을 오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백양사 애기단풍을 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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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들과의 소박한 연대 

백양사 진입로에 접어들자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밤이 찾아온 계곡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 어두운 숲을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광선검처럼 갈랐다. 너무 어두운 탓에 자칫 지나칠 뻔한 입구를 겨우 찾아 캠핑장으로 들어섰다. 늦가을의 평일 밤이라 텐트 몇 동이 전부였다. 

 

캠핑 장비를 나르다 모닥불을 쬐고 있는 한 캠퍼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얼굴을 끄덕이는 것으로 연대감을 표시했다. 나 역시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것으로 우리는 오늘 밤을 함께 보낼 이웃이 됐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사람 사이의 이런 연대감을 좋아한다. 그와 내가 공감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오늘 밤 서로 이웃이 된 그 캠퍼와 나의 연대감은 둘만의 비밀에서 비롯된다. 그는 가을의 백양사를 알고 있다. 주말이면 아침부터 단풍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백양사 진입로가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차량 진입은 고사하고, 인파에 밀려 허겁지겁 백양사를 돌아보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가인 캠핑장에 머무는 우리는 다르다.


가인 캠핑장은 백양사 턱밑에 있다. 이곳에서 머물면 인파에 치일 일이 없다. 아침 일찍 서두르면 가을 산사의 고즈넉한 풍경을 오롯이 독차지할 수 있다. 그와 내가 느끼는 연대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행락객은 꿈에도 모르는, 은밀한 가을 산책의 비결을 오직 그와 나만이 알고 있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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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백양추내장(春白羊秋內藏)이란 말이 있다. 엄밀히 따지면 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 세워진 사찰로 내장산국립공원 내장산지구에서 30여 분 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봄에는 백양사의 벚꽃이, 가을은 내장산의 단풍이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백양사의 가을도 봄빛 못지않다.


백양사에는 애기단풍이 있다. 잎은 작으면서 색깔이 핏빛처럼 고운 단풍잎이다. 나는 백양사 돌담에 치렁치렁 걸린 애기단풍을 보면 머릿속까지 붉어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어찌 이리 붉을 수 있을까!

 

이른 아침에 시작되는 나의 단풍산책은 쌍계루에서 백양사를 거쳐 학바위까지 이른다. 쌍계루는 호수에 물든 단풍과 산을 바라보는 맛이 있다. 쌍계루 앞 호수는 산이 붉으면 호수도 붉고, 벚꽃이 피면 호수도 흰옷으로 갈아입는다.


동양화에서 흔히 보던 풍경 그대로다. 백양사 마당에서 학바위를 올려다보는 일도 가슴을 벅차오르게 한다. 대웅보전의 번쩍 들린 처마 뒤로 또 그만큼의 맵시를 자랑하며 치솟은 바위라니!

 

학바위까지는 다리품을 좀 팔아야 한다. 등산로가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팍팍한 오르막을 30분쯤 가야 한다. 그래도 영천암에서 한 박자 쉬어갈 수 있어 큰 힘이 된다. 등산객들은 학바위 중턱의 영천굴을 지나 상왕봉까지 간다. 그러나 단풍놀이는 영천굴까지면 족하다. 이곳에서 불바다를 이룬 단풍 속에 들어앉은 백양사를 내려다보면 가을을 보내도 아쉬움은 없다.

 

여기서 산양이 스님의 설교를 받고 눈물을 흘려 절을 백양사로 고쳤다거나, 하루에 꼭 먹을 만큼씩 쌀이 나오던 굴을 부지깽이로 쑤셨더니 쌀 대신 흙탕물이 나왔다는 영천굴의 전설 같은 것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


백양사 사천왕문 곁에 서있는, 전생에 네 참모습은 어떠했느냐고 묻는 ‘이뭣고’ 탑에 대해서도 토를 달지 않겠다. 가을이면 단풍의 물결 속에서 오히려 더 푸른 비자나무가 내뿜는 청신한 기운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겠다. 더 보태면 잔소리일 뿐이다. 가을 백양사에 가면 다 만날 절경이다.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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