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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작가의 ‘세상의 희망 상자’] 영구 마누라



헤살꾼인 사내아이들이다. 걸핏하면 이름 대신 ‘식혜’라고 부르곤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이외에 별명 하나가 더 있었다. ‘딱따구리’가 그것이다. 당시 가장 귀에 거슬리는 별명은 딱따구리였다. 수업이 끝나면 교실에 남아 웅변대회 연습을 했다. 사내아이들이 내가 연습하는 웅변 내용의 한 대목을 흉내 내며 놀릴 때면 화장실에 숨어 혼자 울곤 하였다.

 

그래서일까. 훗날 결혼 후에는 제발 이름을 꼭 불러달라고 배우자가 될 사람에게 미리 주문한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껏 남편은 연애 때의 그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젊은 날과 달리 몸매가 다소 통통해지자 “통실아!”라고 부르곤 한다. 어려서 별명에 시달렸던 트라우마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으련만…. 결혼해서도 남편 입을 통하여 이름 대신 여전히 별명을 듣고 있다.

 

어제 일이다. 집 앞 호숫가 둘레길로 새벽 운동을 나갔다. 한참을 뛰다가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하여 수변(水邊) 벤치에 앉았다. 옆 의자엔 초로의 부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둘이서 도란도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남자가 여인에게 “영구 마누라, 오늘은 운동 안 나왔네”라고 말한다. 그러자 여인은 “선희 씨, 오늘은 늦잠 자나 봐”라고 응수한다. 이 말에 남자는 “영구 마누라, 요즘 살 많이 쪘던데 운동 좀 열심히 해야겠어”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에 여인은 “‘영구 마누라’로 부르지 말고 ‘선희 씨!’로 부르라”고 말한다. 그는 아내의 이 말에 ‘영구 마누라’가 더 부르기 편하단다. 남의 마누라 이름을 늘 불러주어야 하느냐며 여인에게 항변까지 한다.

 

비록 낯선 부부가 나누는 대화의 귀동냥이지만 갑자기 입맛이 씁쓸했다. 양성평등 시대라는 현대에도 여자는 결혼만 하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잃고 산다는 것을 새삼 느껴서이다. 여자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아무개 엄마, 누구 아내로 살아가기 예사 아닌가. 엄연히 여성도 부모가 낳아 키우고 교육시킬 때는 아들과 동등하게 양육했잖은가.

 

이름이 뭐 별거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 모르나, 삶 속에서 이것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호칭은 사회적 신분의 고하를 판가름하게 하며 사물의 성질 및 특성을 분별하게 한다.

 

가령 어느 회사 사장을 일개 사원의 호칭으로 부른다면 어찌 될까. 대학교 교수님을 “학생!”이라고 부른다면 얼마나 큰 실수이고 무례일까. 우리가 오징어를 고등어라고 지칭한다면 혼란스러울 듯하다. 인간은 물론 모든 사물에는 각자 고유의 명칭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이름이 요즘은 변질된 경우도 있다. 젊은 여성들이 결혼해서도 자신의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게 그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게 “동생아!”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식당에 가서도 여성 종업원을 “이모!”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찌 식당 여종업원이 자신의 이모란 말인가. 이모는 어머니의 여동생 혹은 언니를 일컫잖은가.

 

하다못해 해마다 온 나라를 몇 번씩 강타하는 반갑잖은 태풍에도 호칭을 붙여준다. 개가 새끼를 낳아도 강아지마다 이름을 붙인다. 계절마다 다투어 피어나는 꽃과 잡초에도 명칭이 주어졌다. 이로 보아 호칭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렇다고 하여 이름이 제 구실을 다하는 것만은 아닌 성싶다.

 

이규태의 글 ‘장관(長官) 호칭 考’를 살펴보면 장관이라는 말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듯하다. 우선 ‘관(官)’ 하면 ‘민(民)’과 대치되는 이미지가 물씬한 터수에 첫 글자가 우두머리 ‘장(長)’자까지 붙고 보니 국민 위에 군림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란다.

 

즉 관리(官吏)라는 말을 공무원(公務員)으로 바꾼 이유가 관료주의적인 군림 이미지가 민주주의 세상에 걸맞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 관리의 장이라는 뜻인 장관이란 말이 아직도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은 모순이라고 일갈했다. 그의 언명으로 미뤄봐도 이름에 내재된 의미는 자못 지대하고 의미심장하다.

 

이 참에 이 땅의 기혼 여성들을 누구 엄마, 아무개 아내, 아줌마로만 부르지 말았으면 한다. 그들에게도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정당하게 되찾아주는 작은 배려야말로 진정 성평등 시대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세상의 희망 상자’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 2021년 계간지. 《에세이 포레》수필 평론 부문 <서정과 삶의 집적>으로 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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