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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가능성의 발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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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에 아이젠을 단단히 채우고 눈길을 오르는 길, 임상춘(74) 씨는 연신 “원더풀”을 외쳤다. 그는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공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강원도 태백에 터를 잡은 지 40년 된 터줏대감이다.


나고 자란 곳은 태백이 속해있던 삼척이기에 평생을 백두대간의 등에 업혀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흰 솜이불 덮은 산천초목쯤이야 도로 위 가로등만큼 덤덤한 광경일 텐데, 정년퇴직 후 여행안내사로 새 일상을 시작한 그의 눈에는 구관이 명관인가 보았다.

태백산맥의 원줄기에 속하는 대덕산 들머리부터 검룡소(儉龍沼)까지는 1.5km 내내 오르막만 이어지는 산행로다. 그러나 호탕한 감탄사를 배경음으로 걷는 사이, 힘든 줄 모르고 금세 검룡소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메마른 계절에도 하등 미약해지지 않은 지당(池塘)이 장대한 기백을 뽐내며 우리를 맞았다.

문학박사 손윤권이 지역 연구가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재편한 단편 설화 ‘검룡이, 드디어 용 됐다’를 단숨에 읽고 온 건 잘한 일이었다. 용천수로 가득한 검푸른 못에서 금방이라도 청룡이 몸을 비틀며 솟아날 것 같았다.


514㎞ 길이의 유장한 강줄기가 시작되는 곳, 우리 민족의 젖줄이 솟는 근원지로 추앙받는 소(沼), 가히 한강의 발원지다운 기골이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먹지 않아도 배부르게 하는 힘이 있다는 청정수를 두 손 가득 퍼내어 들이켜봐야지.

도착 전부터 잔뜩 부풀었던 기대는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멀찌감치 설치된 데크 앞에서 무색해졌다. 하지만 그 맛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태백은 평균 고도가 902m인 고지대 땅이다. 맑고 서늘한 공기가 입안으로 훅 끼쳐 들어온 순간, 바람결이 혀를 시리게 감쌌다. 폐부를 치르는 냉기에 깜짝 놀란 혈관들이 우당탕대며 움직이는 듯한 파동이 몸속을 훑고 지나갔다.


산을 제외하고 생활터로서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지역이리라 추정해보면, 한반도의 공기도 태백에서부터 아래로 흐르겠다는 짐작이 무리 없이 가능했다.

“태백은 다른 지역보다 공기 중 산소량이 2% 정도 높아요. 맑은 공기가 스트레스 지수를 낮춰 범죄율이 낮고 두통이 없죠.”

시내에서 만난 또 다른 문화관광해설사 김금자(62) 씨의 설명을 듣고는 청량한 공기의 감촉으로 수원(水源)의 맛을 확신했다.

드높은 땅은 제 안에 흐르는 피 같은 지하수를 밑으로 흘려보내는 일을 숙명으로 삼은 것일까. 태백은 또 하나의 중요한 생명의 지류를 탄생시켰다. 남한에서 제일 긴 강, 낙동강이다. 강의 발원지가 되려면 세 개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하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샘이어야 하고 물이 쉼 없이 솟아 나와야 하며 바다까지 물길이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검룡소와 함께 세 조건을 모두 갖춘 낙동강의 발원지가 황지연못이다. 매일 지하수가 용출되는 수굴은 물속 어딘가에 감춰져있어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약 525㎞에 이르는 여정을 스스로 깊어지며 나아갈 물줄기의 내강한 힘을 그저 상상해볼 뿐이었다. 그 깊이조차 파악되지 않은 원천은 어쩐지 인간의 내면처럼 아득하고 신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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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에서 눈을 거두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결코 멈춰서는 안 될 풍경이 흐르고 있었다. 연못가를 따라 거니는 나란한 걸음과 맞잡은 손들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처럼 형형했다. 허황한 기분이라 해도 좋았다.


땅 속 깊은 물을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자력이 사람에게까지 작용해 이곳에서는 왠지 삶의 원기가 회복되는 듯한 느낌에 휩싸일 수 있다면.


이 땅을 흐르는 신묘한 기운에 기대어, 이따금 주저앉고 마는 시간을 가뿐히 일으키며 살면 얼마나 좋을지 헤아렸다. 연못이 있는 황지동에서 조금 벗어난 철암동을 거닐며 소멸에서 생성된 시간의 실체를 마주했다.


1926년 국내에서 처음 노두(露頭)가 발견된 뒤부터 마지막 남은 장성광업소가 폐광한 작년까지 100여 년 동안 이어진 한국 석탄산업의 시대가 저문 자리에 다시금 새로운 문화가 꽃피웠다.


태백시는 탄광 산업의 중심지였던 철암동을 그대로 보존해 놓았는데 남겨둔 방법이 재밌다. 겉과 속이 달라서다. 철암역부터 철암쇠바우골까지 일렬로 늘어선 가게들은 낡고 어두컴컴해 폐점한 상점처럼 보인다. 세월의 더께가 두껍게 내려앉은 가게들의 정체는 문을 열어야 드러난다. 경북식당으로 들어가면 순대국밥 대신 아기자기한 석탄 조각품이 반기고 아궁이 앞은 식재료가 아닌 연탄 재료가 차지했다.


연탄 만들기 체험장으로 탈바꿈한 경북식당 옆 호남슈퍼는 1970년대 광부의 일상이 옮겨와 다양한 옛 물건들이 향수를 자극한다. 이찬우 님이 쓰던 철제도시락, 백미세탁공장에서 쓰던 재봉틀 등이 조금 전까지 사용한 듯 손때 묻고 흠집 난 모습 그대로다.

몇 걸음 옮기면 ‘노래주점 산울림’과 ‘특실당구장’ 간판이 철암동의 풍경을 담은 미디어아트와 설치 예술품을 품은 채 검버섯 핀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옛 흔적을 지우고 새 동네를 건설할 수도 있었을 텐데 탄광촌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 결정 내리지 않았다. 소멸해가는 시간의 한가운데 선다는 건 어둠에 포박당한 상태와 매한가지일 테다. 암담하고 고단하며 포기하고 싶은 심정. 하지만 도망치지 않고 그 안에서 새 빛을 밝혔을 때 마주할 현실이 철암동에선 선명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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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을 코앞에 둔 나이에 연탄 만들기 체험 도우미를 시작했어요. 동네 아이들이 발에 새카맣게 석탄 가루 묻히며 놀던 이야기 같은 걸 해주면 사람들이 참 재밌어해요. 고리타분해할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모습들을 보니까 우리 동네가 다시 전성기를 맞을지도 모르겠단 기대가 생겨요.”

하나의 발원지는 하나의 시작만 잉태하지 않는다. 그 영험한 곳엔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해있어 새로움이 끝없이 탄생한다. 검룡소와 황지연못은 매일 용출되는 수량이 각각 2,000t, 5,000t에 이른다. 올겨울 체감온도가 영하 30도까지 내려간 날에도 쉬지 않고 새 물을 퍼 올렸다. 태백의 발원지들은 아무리 혹독한 추위가 찾아와도 얼어붙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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