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가에 퍼지는 미성(微聲)의 울림
- Weekly Korea EDIT
- 7월 20일
- 3분 분량

앞쪽에 달린 털 뭉치를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여 사용하는 음향기기. 꼭 권총처럼 생긴 이 장치로 말하자면, 작은 소리를 크게 증폭시켜 들려주는 지향성 녹음기로 ‘청각용 현미경’이나 다름없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배우 유지태가 사용한 구형과 달리 지금은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소형화돼 자연의 미세한 소리까지 생생히 감상하며 걷는 산책이 가능해졌다.
기술의 힘을 빌려 여행객을 대상으로 ‘사운드워킹’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여러 지역 중 전남 담양을 향해 두 발이 움찔댔다.
아마 귀에 들리진 않지만 공기를 타고 흐르는 소리의 파동에 대한 몸의 반사 행동이었을 터. 그 초음(超音)의 정체는 나무가 부르는 소리였으리라.
전체 354개 마을 중 350곳에 대나무숲이 있는 담양에서는 사람과 나무가 각별한 이웃지간이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서만은 아니다. 보릿고개 시절에 죽세공품을 만들어 생계를 잇던 과거를 지역민들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고, 나무는 중국산 죽제품이 유입되면서 홀대받던 자신들에게 너른 보금자리를 마련해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시련에 꺾이지 말고 무성하게 무리 지어 굳세게 살아가라고 25년 전 성인산 자락에 조성한 죽림 ‘죽녹원’에 들어서면 대나무들이 오랫동안 미뤄온 인사를 전한다. 쏴, 쏴.
빽빽이 솟아올라 하늘을 가리고, 작은 바람에도 부지런히 나부끼는 대나무의 집에서는 보고 듣는 대상에 대한 선택권이 주인에게 있다.
어딜 둘러봐도 대기둥과 죽엽이 시야를 압도하고, 바깥 소음을 차단한 채 댓잎 사이로 부는 풍운(風韻)을 귓속으로 밀어 넣는다. 인정사정없는 속박일진대 손님은 저항심은커녕 순종을 자처하고 싶어진다.
‘경청할 준비가 돼있으니 마음껏 소리내 보세요.’ 녹음기의 전원을 켜고 마음 속으로 신호를 보내자 잊고 지내온 기억 하나가 되살아났다.

사회 초년생 시절, 필리핀 세부로 떠난 여행에서였다. 망망대해에 둥둥 뜬 배 위에서 산소통을 멘 채 두려움과 싸우다가 깊은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마침내 바닷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난생처음 마주한 신세계를 유영하며 엄습한 감정은 뜻밖에도 삶의 회한이 서린 저릿함이었다. ‘내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편협하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를 모르고 살아왔을까.’ 자연을 향한 경이(驚異)는 받아들이기 버거울 만큼 대단해 또 경험할 기회가 다신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토록 신비한 세계가 나무의 세계였다니!
호흡이 아닌 청각에 의존해 뛰어든 세상에서는 모든 생명이 소리로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푸드덕거리며 잎사귀 사이를 옮겨 다니는 산새, 신발에 밟힐 때마다 자박자박 우는 돌멩이, 하늘하늘 떨어져 풀잎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 마른 댓잎마저 자기만의 소리를 냈다. 대숲에서는 소거 당하는 음이 아무것도 없었다. 햇살에서도, 노을에서도, 공기에서도 소리가 날 것 같아 걸음이 산뜻했다.
자연의 금옥성(金玉聲)에 너무 깊이 도취했나. 문화해설사의 축축해진 등을 보고서야 사운드워킹을 마무리할 시간임을 알았다. 두 시간을 걷고도 아쉬워 죽녹원을 나와서 바로 앞 관방제림으로 향했다.
흙길에 아름드리나무들이 양쪽으로 도열한 단순한 풍경이었지만 듣는 재미를 알아버린 산책자에게 더 이상 시각적인 요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200여 년 넘은 활엽수들은 과연 어떤 소리를 품고 있을지 궁금해 거목들의 행렬에 기꺼이 동참했다. 109번 느티나무, 134번 푸조나무, 169번 느티나무…. 나무마다 걸린 이름표의 번호가 높아질수록 호기심은 커졌지만 더 이상 기기의 힘을 빌릴 수 없었다. 내 발소리를 낮추는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느리게, 가능한 한 사뿐사뿐 걸으며 수상하게 보일 행동을 이어갔다. 나무 기둥에 귀를 바짝 갖다 대보고, 수피를 문지르며 다시 귀를 밀착시켜봤다. 이럴 때 인간의 신체적 능력은 참 미약했다. 기기를 통해 잘도 들려오던 댓줄기 속 물소리, 나뭇잎과 손가락의 마찰음 같은 소리들은 감감하기만 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1.2km에 이르는 관방제림의 끝에 다다랐다. 그런데 다시 새로운 길이었다. 이번엔 메타세콰이어길이었다. 담양은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자꾸 또 다른 길이 나타나 나무를 따라 걸으면 이대로 옆 동네 정읍까지, 더 나아가 서울까지, 내친김에 하늘까지도 가닿을 것만 같았다.

그럴 리는 만무해도 마을 하나쯤은 거뜬히 넘나든다. 매표소에서 학동리를 거쳐 금월교차로 전방에 이르는 8.5㎞ 길이의 산책로는 여름이면 깊고 넓은 신록의 터널로 변신한다. 1970년대 초, 담양과 순창을 잇는 국도에 식재된 삼나무들이 길가에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무성한 초록 잎들로 하늘을 가린다.
쌍둥이 같은 수목들을 양쪽에 두고 가운데 서서 정면을 응시하자 소실점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진입로 같다는 기분은 착각이 아니었다.
개구리생태관 앞에서 삼나무가 빙 두른 호수를 맞닥뜨리고는 두 발이 고목나무 위 매미처럼 호숫가에 달라붙었다. 나이 지긋한 수목들이 비밀스럽게 품고 있는 고요 속에서 조금씩 알 수 없는 미성(微聲)이 들려왔다.
뽀글뽀글, 뽀글뽀글. 출처를 찾으려 수면을 살폈지만 그대로였다. 다만, 믿고 싶었다. 소금쟁이의 걸음 소리나 땅이 숨 쉬는 소리였을 것이라고. 얼마쯤 지났을까. 귓가를 간질이던 음은 어느새 다가온 사람들의 말소리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소설가 김연수는 에세이 《언젠가, 아마도》에서 ‘세상은 날마다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결같은 것처럼 보인다면 내가 모르는 게 있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한결같은 것처럼 들려도 마찬가지일 테다. 다행히 죽녹원에서 해설사로부터 지식 하나를 얻은 뒤부터 달리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녹음기로 들으니 걸음 소리가 굉장히 크죠? 작은 동물들은 호랑이나 사자보다 사람의 발소리를 가장 무서워해요.” 인기척이 두려움의 근원으로 인식되자 물음표가 생겼다.
어떻게 하면 발소리를 더 낮출 수 있을까. 그건 인생의 질문 같았다. 어떻게 하면 더 자세를 낮추고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도 즐거우면 호탕하게 웃을 테고, 바쁘면 쿵쾅쿵쾅 뛰어다닐 것이다. 그러다 문득문득 궁금해질 것을 안다. ‘나는 지금 어떤 크기의 소리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때 다시 나무의 품을 찾아와 귀 기울일 것이다. 이번엔 나를 향해서.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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