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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작가의 ‘세상의 희망 상자’] 9월이 오는 소리

최종 수정일: 8월 4일


“귀뚜라미 울음소리 속에 깃든 가을의 추억” – 초저녁 아파트 정원에서 가을 정취를 전하는 귀뚜라미의 모습. ⓒ OpenAI 생성 이미지
“귀뚜라미 울음소리 속에 깃든 가을의 추억” – 초저녁 아파트 정원에서 가을 정취를 전하는 귀뚜라미의 모습. ⓒ OpenAI 생성 이미지

초저녁 아파트 정원만 나서도 가을 내음이 물씬 묻어난다. 지난여름 온 나라가 용광로속 같았다. 폭염이 물러가자 어느 사이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이 서늘하기까지 하다. 어디 이뿐이랴. 아파트 정원 풀숲에 숨어서 우는 풀벌레 울음소리조차 싱그럽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그 울음 중에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단연 우세하다. 풀벌레 소리 중 가장 가을이 성큼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을 실감케 하는 게 귀뚜라미 울음소리 아니던가.

 

가을만 돌아오면, 아니 귀뚜라미 울음소리만 들려오면 어린 날 막내 이모와의 이별이 문득 떠오르곤 한다. 대 여섯 살 무렵 외가에 가면 이모는 시오리 길을 걸어 중학교를 등교하곤 했었다. 이 때마다 이모를 따라가겠다고 울며불며 앞장서서 길을 나설만큼 이모를 유난히 따랐다.


친정아버지가 함흥 청진이 고향인지라 친가 쪽으론 친척이 없다. 이러다보니 자연 외가 피붙이들한테 우린 많은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다. 특히 이모들과 외삼촌은 우리만 외가에 가면 눈깔사탕, 꽃고무신을 사주곤 했다. 초등학교 때 일이다. 대학을 다니던 막내 이모는 시골을 떠나 우리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 때 같은과 남학생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둘이 사귀는 것을 외가에서 반대하자 행한 일이었다.

 

9월 어느 날로 기억한다. 유독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리던 밤 이모는 보따리를 싸안고 집안 식구들 몰래 집을 나선 것이다. 이모랑 한 방을 썼다. 잠결에 본 이모 모습은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자그마한 옷 보따릴 가슴에 부둥켜안은 채 어딘가 불안해하는 이모였다.

 

이 때 이모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아무소리 말라는 입단속과 함께 홀연히 집을 나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울음을 삼켜야 했다. 그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더욱 나의 슬픔을 부채질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기가 자취를 감추고 귀뚜라미가 등에 가을을 업고 온다는 처서處暑도 지난 지 오래다. 그래서인지 원형圓形의 아파트 정원엔 요즘 따라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무성하다. 가을만 돌아오면 이모와의 지난날 가슴 아픈 이별 때문인지 귀뚜라미 소리가 참으로 처연하게 느껴진다. 단장斷腸의 소리여서 일까?

 

이런 서글픈 심경과 달리 귀뚜라미는 우리의 전통적 정서를 자아내는 벌레였단다. 이규태가 지은 '눈물의 한국학'에서 읽은 내용에 의하면 옛 선비가 과거길이나 타향 벼슬길에 오를 때 일이다. 귀뚜라미를 풀 섶에 싸갖고 가서 창가에 올려놓고 고향의 소리를 듣는 풍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필자는 지난여름 날만 새면 울어 젖히는 매미소리에 귀를 막곤 했잖은가.곤충 울음소리조차 소음 공해로 여기는 요즘과는 대조적인 멋진 옛 풍경이다. 뿐만 아니라 북쪽 고을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틀리고 호남 고을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현저히 다름을 판별했다고 한다. 이로보아 현대인들보다 청각이 유달리 예민했던 조상들이었나 보다.

 

또한 한양 어느 목로 집 처마엔 향토색으로 우는 귀뚜라미를 올려두고 그 울음소리로 향수병 앓는 손님들을 호객할 정도였다고 하니 이토록 세련된 벌레문화가 이 세상 어떤 나라에도 없다고도 했다. 이렇듯 우린 귀뚜라미를 정서적으로 이용하는 반면, 딴 나라에선 소일거리로 사용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투견鬪犬, 투계鬪鷄 하듯이 귀뚜라미로 투충鬪蟲을 하는 도박도 즐겼단다. 일명 추흥秋興이라고 한다는데 수컷끼리 대결 시켜놓고 지푸라기로 수염이나 꼬리털을 자극시키면 머리를 들이대고 상대 귀뚜라미를 물어뜯어 죽임으로써 승패를 가리는 싸움이란다.

 

그러고 보니 귀뚜라미가 안겨주는 가을 정취에 흠뻑 젖을 만큼 마음의 여유를 지녀보는 것도 9월이라는 계절이 안겨주는 감흥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왠지 해마다 가을이 돌아오는 게 실은 썩 달갑지 만은 않다.

 

곧 머잖아 새해를 맞이하고 또 나이를 한 살 먹잖은가. 어찌 보면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심연에 우울한 나이테를 몇 겹 안겨주는 예고로 생각한다면 나만의 착각일까? 이런 생각 때문인가. 가을의 초입인 9월을 맞이하노라면 가슴이 텅 빈 듯 허허로움 마저 느낀다.

 

하지만 무엇이든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 가는 청춘은 누구도 붙잡을 수 없다. 천하장사도 오는 세월은 막을 도리가 없다. 이로보아 가을이 찾아왔음을 알려주는 귀뚜라미 소리를 슬픈 추억이 깃든 소리로만 여길 일이 아닌 듯하다.

 

9월의 소리이기도 한 귀뚜라미 울음 속엔 풍요와 결실을 약속하는 계절의 순리도 내재돼 있잖은가. 9월엔 지난 시간 타인으로 말미암아 상처 입었던 슬픈 감정들이 혹여 가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면 그것부터 과감히 거둘까 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내면이 무르익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세상의 희망 상자’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 2021년 계간지. 《에세이 포레》수필 평론 부문 <서정과 삶의 집적>으로 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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