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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종 발행인 칼럼] 혐오는 말에서 시작된다

한국 사회의 혐오 발언, 그리고 호주가 던지는 경고


17일(현지시간) 호주 시드니 본다이 비치에서 시민들이 흉기 공격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헌화 장소에 꽃을 놓고 있다. EPA연합뉴스
17일(현지시간) 호주 시드니 본다이 비치에서 시민들이 흉기 공격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헌화 장소에 꽃을 놓고 있다. EPA연합뉴스

최근 한국 사회에서 혐오 발언이 일상처럼 소비되고 있다. 특정 집단을 향한 조롱과 낙인,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 급속히 확산되는 혐중(嫌中) 발언은 이제 단순한 감정 표현의 수준을 넘어 사회적 문제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이러한 언어가 개인의 분노 해소나 정치적 수사로 그치지 않고, 집단 간 갈등을 구조화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토양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혐중 발언은 흔히 외교 갈등이나 경제적 경쟁, 감염병 경험 등을 명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 표현 방식을 들여다보면 비판이라기보다는 특정 국적과 민족 전체를 열등하거나 위협적인 존재로 일반화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은 원래 그렇다”, “문명화되지 않았다”는 식의 언어는 개인이나 정책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집단 전체를 비인격화하는 혐오의 전형적인 문법이다.


이러한 발언은 온라인 커뮤니티, 유튜브, 정치적 선동의 언어 속에서 빠르게 증폭된다. 알고리즘은 분노와 자극적인 표현을 더 널리 퍼뜨리고, 혐오는 클릭 수와 정치적 동원의 도구로 소비된다. 그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혐오 발언은 점점 더 정당화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타인의 존엄을 침해할 권리까지 포함하지 않는다.


문제는 혐오 발언이 결코 말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언어는 인식을 만들고, 인식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특정 집단을 위협적 존재나 사회의 짐으로 규정하는 담론이 반복될수록, 차별은 ‘상식’이 되고 폭력은 ‘이해 가능한 선택’으로 포장된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증오 범죄는 그 공통된 출발점이 바로 혐오 발언이었음을 보여준다.


최근 호주 시드니 본다이 비치에서 발생한 유대인 대상 총기 테러 사건은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호주 정부는 이 사건을 단순한 범죄가 아닌 ‘증오와 급진화가 결합된 테러’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 대응으로 혐오 발언 규제를 대폭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폭력을 직접 선동하지 않더라도, 특정 집단을 비인간화하고 증오를 확산시키는 발언 자체를 법적으로 제재하겠다는 방향이다.


호주 정부가 주목한 것은 ‘문턱(threshold)’이었다. 기존 법률은 실제 폭력 선동이나 직접적 위협이 있어야 처벌이 가능했지만, 현실에서는 그 문턱 바로 아래에서 혐오가 축적되고 급진화가 진행됐다. 결과적으로 법은 폭력이 발생한 뒤에야 작동했고, 사회는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번 법 개정은 그 한계를 인정하고, 혐오의 초기 단계에서 개입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한국 사회도 이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우리는 지금 혐오 발언의 문턱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말일 뿐’이라는 이유로 방치된 언어들이 사회적 소수자와 이주민, 특정 국적 집단을 어떻게 고립시키고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혐중 발언 역시 외교 비판이나 정책 비판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수많은 중국계 이주민과 유학생, 노동자들을 잠재적 적으로 만들고 있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정치가 이 언어를 이용할 때다. 혐오는 손쉬운 동원 수단이다. 복잡한 사회 문제를 특정 집단의 탓으로 돌리면 설명은 간단해지고 분노는 결집된다. 그러나 그 대가는 사회 전체가 치른다. 혐오가 허용된 사회에서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오늘의 표적이 내일은 다른 집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혐오 발언 규제는 결코 사상의 통제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호주의 사례가 보여주듯, 혐오를 방치하는 사회는 결국 더 강력한 국가 권력과 치안 비용, 그리고 공동체의 붕괴라는 청구서를 받게 된다. 반대로 초기 단계에서 혐오를 제어하는 사회는 갈등의 폭발을 막고,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지킨다.


한국 사회 역시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혐오 발언을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표현’으로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민주 사회의 가치에 어긋나는 위험 신호로 인식하고 책임 있는 규제와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갈 것인지다. 혐오는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결과를 낳는 공공의 문제다.


말은 씨앗이다. 어떤 씨앗을 뿌릴 것인지는 사회의 선택이다. 증오의 씨앗을 방치하면 폭력이라는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침묵이 아니라 분명한 기준이다. 혐오는 자유가 아니라, 사회가 반드시 제어해야 할 위험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발행인 안기종 



위클리코리아 발행인 안기종
위클리코리아 발행인 안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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