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9시간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났다
“더 이상 이런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환자 안전의 날, 의료현장 경험자들이 정치권에 묻다
과부하된 의료 시스템이 환자와 가족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직접 경험한 시민들이 정치권에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세계 환자안전의 날(World Patient Safety Day)을 맞아 열린 한 지역사회 행사에서는 병원 응급실에서 장시간 기다린 끝에 아버지를 잃은 유가족부터 고가의 항암제를 직접 구입해야 했던 환자까지, 뉴질랜드 의료체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다양한 경험이 소개됐다.

그 가운데 참석자들의 큰 관심을 모은 사람은 아버지 브렌트 호스버그(Brent Horsburgh)를 와이카토 병원에서 잃은 딸 테일라 호스버그(Tayla Horsburgh)였다.
테일라는 당시 아버지가 병원 대기실에서 약 9시간을 기다린 뒤 숨졌다고 말했다.
그녀에 따르면 당시 병원은 정원을 100% 이상 초과한 상태였으며, 오후 근무조에는 의사 4명과 간호사 2명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테일라는 아버지가 병원에 도착한 뒤 장시간 기다렸고, 새벽 1시쯤 가족에게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고 회상했다.
병원 측은 아버지가 쓰러졌으며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있으니 가능한 한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가족에게 알렸다.
테일라는 어머니 트레이시, 여동생 조딘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가족들은 가족대기실에서 기다리라는 안내를 받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문 앞에 있던 간호사에게 아버지가 괜찮은지 물었고, 간호사는 괜찮다고 답했다고 테일라는 전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들어와 가족들에게 심폐소생술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으며 브렌트가 사망했다고 알렸다.

테일라는 당시 간호사의 말이 가족들에게 잘못된 희망을 갖게 했다고 말했다.
“그 순간은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한 테일라는 의료진과 가족 사이의 의사소통 역시 환자 안전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약 한 알에 458달러”…환자들이 체감하는 의료비 부담
이날 행사에서는 의료 접근성과 의약품 비용 문제도 주요 논점으로 등장했다.
또 다른 참석자인 버니 브레이스웨이트(Bernie Braithwaite)는 다발성 골수종(multiple myeloma)이라는 혈액암을 앓으면서 약 15년 동안 생존해 온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는 혈액 및 혈장 기증 과정에서 이상이 발견되면서 질환을 확인하게 됐고, 치료 과정에서 당시 정부 보조 대상이 아니었던 약물 레날리도마이드(lenalidomide)를 사용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약값은 3개월분에 약 2만2천 달러에 달했다.
그는 “작은 캡슐 하나를 집어 들 때마다 458달러였다”며 환자가 감당해야 했던 경제적 부담을 회상했다.
현재는 해당 약물이 Pharmac의 지원 대상에 포함돼 있지만, 브레이스웨이트는 의약품을 단순한 지출이 아니라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사회에 계속 참여하도록 하는 투자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권에 의약품 지원의 공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리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지속될 수 있는 장기적인 의료정책에 합의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정당별로 다른 해법…의약품 예산 확대와 초당적 접근 제시
행사에는 주요 정당 관계자들도 참석해 의료정책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ACT의 오클랜드 센트럴 후보 안토니아 모드코바(Antonia Modkova)는 ACT가 호주와 뉴질랜드 사이의 의약품 지원 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제안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ACT는 의약품에 배정되는 보건예산 비중을 매년 1%포인트씩 늘려 2033년까지 호주와의 의약품 지원 격차를 줄이겠다는 입장이다.

Opportunity의 노스코트 후보이자 전 구급대원인 코디 마시(Cody Marsh)는 의료정책이 정권 교체에 따라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초당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정당의 의약품 관련 정책과 협력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추가 재원을 마련하려면 그 돈을 어디에서 가져올 것인지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당(National)의 마운트 로스킬 지역구 의원 카를로스 청(Carlos Cheung) 역시 정당마다 의료 접근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국민을 위한 더 나은 의료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노동당(Labour)의 테 아타투 지역구 의원 필 트와이포드(Phil Twyford)는 의약품에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구체적인 정책은 선거에 가까워진 시점에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각 정치인의 발언은 의료비와 의약품 지원 확대라는 공통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재원 마련 방식과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는 정당별 접근법이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줬다.
정신건강 문제도 의료체계의 중요한 과제
이날 행사에서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정신건강 문제도 논의됐다.
16세 딸 매디(Maddy)를 자살로 잃은 개러스 홀(Gareth Hall)은 정치권에 정신질환을 겪는 어린이들을 어떻게 안전하게 보호할 것인지 물었다.

이에 뉴질랜드 퍼스트(NZ First)의 글렌던 후보 알프레드 응가로(Alfred Ngaro)는 가족과 어린이를 지원할 수 있는 지역사회 기반의 대응체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녹색당(Green)의 마운트 앨버트 후보 리카르도 메넨데스 마르치(Ricardo Menéndez March)는 전국적으로 청소년 지원 서비스를 확대하고 조기 개입을 강화하겠다는 당의 입장을 설명했다.
또한 청소년에 대한 격리·독방 형태의 조치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방안도 언급했다.
의료체계의 숫자 뒤에는 환자와 가족이 있다
이번 지역사회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는 단순히 병상이나 의료진 숫자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응급실에서 장시간 기다려야 했던 환자와 그 가족, 높은 약값을 감당해야 했던 환자, 정신건강 문제로 자녀를 잃은 가족의 이야기는 의료정책이 실제 사람들의 삶과 직접 연결돼 있음을 보여줬다.
특히 테일라 호스버그의 경험은 의료체계의 과부하가 단순히 “대기시간이 길어지는 문제”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의사와 간호사 부족, 병상 부족, 응급실 과밀화, 의약품 접근성,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의사소통, 정신건강 지원 등 여러 문제가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세계 환자안전의 날을 계기로 열린 이번 행사는 정치권에 단순히 더 많은 예산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환자가 안전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체계를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장기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다시 한번 부각시켰다.
뉴질랜드에서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교민들에게도 이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응급실 이용부터 전문의 진료, 의약품 지원, 정신건강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의료체계의 변화는 모든 주민의 일상과 연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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