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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슨과 피터스, 국회에서 펼쳐진 ‘또 다른 나’

“오늘은 누구입니까?”

 


정치권에서 크리스토퍼 럭슨 총리와 윈스턴 피터스 외교장관을 둘러싼 책임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주 국회에서는 두 정치인이 각각 논란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그때의 나는 다른 역할의 나였다”는 듯한 방어 논리를 내세우면서 정치권 안팎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한 사람은 “나는 장관으로서 말한 것이 아니다”, 다른 한 사람은 “총리는 언제나 총리다”라는 상반된 논리를 사용하면서 뉴질랜드 정치인의 다양한 역할과 의회에서의 책임 범위를 둘러싼 논쟁까지 불러일으켰다.

 

피터스 “그 말은 외교장관이 아니라 의원으로 한 것”

논란의 출발점은 지난 7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벌어진 피터스 장관과 녹색당 로렌스 쉬난(Lawrence Xu-Nan) 의원 간의 설전이었다.


 

피터스 장관이 코로나19 대응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쉬난 의원이 “백신을 맞았느냐”고 질문하자, 피터스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상대 의원을 겨냥한 인종적 표현이 포함된 발언을 쏟아냈다.

 

이후 크리스토퍼 럭슨 총리도 해당 발언이 “공격적이고 인종차별적이었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일주일 뒤 국회 질의시간에서 쉬난 의원이 피터스 장관에게 당시 발언에 대해 설명할 것을 요구하자 상황은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렀다.

 


피터스는 당시 발언을 한 사람이 외교장관 윈스턴 피터스가 아니라 뉴질랜드 퍼스트당 대표이자 국회의원인 윈스턴 피터스라는 취지로 답변했다.

 

국회에서 장관에게 공식적으로 질문하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의원이 아니라 장관이라는 직책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기 때문에, 피터스는 자신의 발언이 장관의 공식 업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편 것이다.

 

말하자면 “그 발언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또 다른 나”라는 셈이다.


하지만 피터스 스스로 논리에 구멍을 냈다

문제는 피터스 자신이 이후 자신의 발언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외교장관으로서 한 자신의 발언과 뉴질랜드 퍼스트당 대표로서 한 발언 모두를 지지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결국 ‘외교장관으로서 한 말이 아니기 때문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펼치면서도, 동시에 해당 발언 자체는 자신의 입장으로 인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 때문에 향후 피터스 장관에게 당시 발언에 대한 책임을 다시 묻는 질문이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번 논란은 단순한 말싸움을 넘어 뉴질랜드 정치인들이 국회의원, 정당 대표, 장관 등 여러 직책을 동시에 맡으면서 각각 어느 범위까지 의회에 책임을 져야 하는지라는 복잡한 문제를 드러냈다는 평가다.

 

럭슨 총리는 정반대 논리…“총리는 언제나 총리”

흥미로운 점은 같은 국회에서 럭슨 총리가 피터스와는 정반대의 논리를 적용받았다는 것이다.

 

럭슨 총리는 최근 국민당 모금 행사에 참석한 뒤 뉴질랜드 공군의 6인승 항공기를 이용해 귀가한 것을 두고 야당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야당은 국민당의 정치자금 모금 행사와 총리의 공식 업무가 어떻게 구분되는지, 그리고 국방부 소속 항공기를 정당 행사와 관련해 이용한 것이 적절했는지를 따져 물었다.

 

이에 대해 럭슨 총리는 해당 일정에 총리로서의 공식 업무가 포함돼 있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오클랜드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특별 항공편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야당은 럭슨에게 “그 행사에 총리로 참석한 것인가, 국민당 대표로 참석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여기서 국회의장 게리 브라운리는 럭슨에게 중요한 방어막을 제공했다.


 

브라운리 의장은 총리는 언제나 총리이며, 총리가 무엇을 하든 총리라는 직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렸다.

 

즉, 럭슨 총리는 정당 행사에 참석했더라도 총리라는 공적 지위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다.

 

피터스와 럭슨의 논리가 서로 충돌?

이번 사건이 흥미로운 이유는 두 정치인의 방어 논리가 서로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스의 논리는 “그때의 나는 장관이 아니라 의원이었다”는 것이고, 럭슨에게 적용된 논리는 “총리는 언제나 총리다”라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정치인이 상황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총리라는 직책은 상황에 따라 벗을 수 있는 ‘모자’가 아니라는 해석이 나온 셈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역할 구분 문제가 새로운 논쟁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존 키 전 총리 역시 자신이 특정 정치적 상황에서 한 발언에 대해 총리가 아니라 국민당 대표로서의 역할이었다는 취지의 설명을 내놓은 바 있다.

 

당시에는 정치인이 총리 외에도 정당 대표나 개인 등 여러 역할을 수행한다는 논리가 활용됐다.


 

하지만 이번 브라운리 의장의 판단대로라면 럭슨 총리가 앞으로 비슷한 상황에서 “그때는 총리가 아니라 국민당 대표였다”는 논리를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다.

 

국민이 주목하는 것은 결국 ‘책임’

이번 논란은 단순히 정치인들의 말장난에 그치지 않는다.

 

국회의원 한 사람이 여러 직책을 동시에 맡는 뉴질랜드 정치 시스템에서 공적인 역할과 정당 활동의 경계를 어디까지 구분할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다.

 

특히 장관은 국민의 세금과 정부 자원을 사용하는 공직자이기 때문에 공식 업무와 정당 활동을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국회의원과 정당 대표로서 자유롭게 정치적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영역도 존재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치인이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역할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기준에 따라 책임과 권한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번 주 뉴질랜드 국회에서 벌어진 ‘두 명의 피터스’와 ‘항상 총리인 럭슨’이라는 묘한 대립은 정치인의 직책과 책임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

 

그리고 앞으로 럭슨 총리와 피터스 장관이 비슷한 논란에 직면할 경우, “그때의 나는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은 계속 따라다닐 가능성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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